葛藤 : 함께 사는 법

페루 : 쿠스코

by 나린


서로 얽기고 설켜 꽈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칡 나무와 등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이 두 나무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칡 나무는 태생적으로 태어나기를 왼쪽으로만 감아 올라가게 태어났고, 등나무는 태어나기를 오른쪽으로만 감아 올라가게 태어났다고 한다. 두 나무는 절대 혼자의 힘으로는 자랄 수 없다. 무언가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같은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하지만 어찌나 고집이 센지, 한 길만 고집한다. 같은 운명이지만 결코 만날 수 없다.




칡 나무가 먼저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어린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곧바로 등나무가 그 위를 타고 올라간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 나무의 기둥이 되었던 어린 나무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어린 나무와 등나무 사이에 낀 칡 나무는 안과 밖에서 조여 오는 힘을 버티지 못한 채 생명을 다하고 만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며 끊임없이 싸움을 하다 결국 어느 하나가 생명을 잃었다. 두 나무 사이는 단단하다 못해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몇 년 후, 죽어 거름이 된 칡 나무가 다시금 새 생명의 싹을 띄운다. 칡 나무는 자신이 죽었던 그곳에서 등나무 위를 타고 올라간다. 온 힘을 다해, 이 전에 펼치지 못했던 생명을 빛을 힘껏 뿜어낸다. 결국 그 힘을 버티지 못했던 등나무는 과거의 칡 나무와 같이 서서히 죽어갔다.


두 나무의 치열했던 갈등은 매번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등나무와 칡 나무줄기에는 서로 타고 올라 움푹 파인 상처가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또다시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번엔 당연하다는 듯이 등나무는 칡 나무 위를 타고 올라간다. 하지만 이 전과는 조금 다른 게 있었다. 서로의 몸에 생긴 상처의 흔적을 보았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등나무는 칡 나무를 꽉 조이며 타고 올라가지 않는다. 두 나무 사이에 여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자연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한다.


칡 나무 갈, 등나무 등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두 글자의 조합.

바로 우리가 서로 상반되는 것을 마주할 때 생기는 것을 뜻하는 '갈등'이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타지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라니, 상상만으로도 설레었고, 들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여행자들끼리 파티를 하기로 했다. 파티 장소엔 맛있는 음식과 흥을 한껏 올려줄 술이 가득했다. 여행 와서 처음 느껴보는 북적거림이었다. 몹시도 그리워하던 사람의 온기와 냄새. 그 향수에 취해, 오랜만에 달아오른 흥분을 만끽했다. 파티와 함께 메인 광장에서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폭죽놀이를 하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아쉬움을 가득 앉은채 숙소로 향했다.


똑똑. 나보다 먼저 숙소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분명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려왔는데... 다시 한 번 똑똑 노크를 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 문 건너편. 그렇게 한 참을 문 앞에 서있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와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남미 여행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짧은 동행을 하기로 했다. 나보다 먼저 여행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숙소, 버스, 일정 등 그녀는 계획을 하고 나는 행동에 옮겼다. 타지에서 처음 만난 것 치고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행 스타일은 정 반대였다. 나는 자유로운 여행을 원했고, 그녀는 정적인 여행을 원했다. 의견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 불편한 감정은 모두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날이선 말투로 서로를 대했다. 둘 사이의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편함을 겉으로 끄집어 낸다는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걸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던것 같다. 대화는 점점 사라졌고 우리는 '배려'라는 명분으로 점점 멀어졌다.


아니다 다를까. 그날 밤 한참이고 숙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밤새 호스텔 라운지에서 밤을 지새우다 이른 새벽 직원에게 스페어 키를 겨우 받아 새벽에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면 분명 신사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 긴 밤 동안 나에겐 더없이 중요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시간이었다. 일주일 남짓 그녀와 동행했던 시간들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먼저 말했다. 이제는 각자의 여행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우린 처음으로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미루고 미뤄왔던 감정이 응어리들을 하나둘 풀어보기로 했다. 순간적인 마음으로는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 갈등을 갈등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 한 발자국 물러나 서로를 바라보는것. 여행 중이라 가능한 결말이었다.


여행 중엔 이상하게 평소보다 관대해지고, '괜찮아, 그럴수 있어.' , '좋은게 좋은거지' 라는 말을 자주 하게된다. 그러고보면 갈등은 지극히 마음의 문제다.


그렇게 우린 안녕을 고했다. 지나고 보니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여행의 첫 시작에 그녀가 있음에 감사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갈등의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보다는 ‘회피’ 또는 ‘감정적 반응’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갈등이 생길 때면 자연스럽게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이다. 갈등 상황 속에 자신의 생각을 굽혀야 할 때 '자존심 상해'라는 말을 쓴다. 그 감정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 조차도 갈등 상황을 마주할 때면 늘 불편해하고 무서워했다.


하지만 여행은 매 순간이 갈등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 자체가 크고 작은 갈등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갈등을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인생은 ‘회피’로 가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갈등의 대상이 타인이 되었든, 나 자신이 되었든 똑바로 마주 볼 필요가 있었다.


등나무와 칡 나무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던 데는, 갈등을 견뎌내고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본 순간부터였다. 심리상담가 모드리 안은 "공감이란 다름 아닌 '상대방의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창으로 본다는 것은 곧 마음의 여백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마음의 여백은 '용기'다. 갈등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와 소용돌이치며 왔다 갔다 하는 감정도 온전히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


어쩌면 갈등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갈등에 머무는 순간 갇히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갈등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상생 相生'이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오랜 시간니 지난 후에 결국엔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