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행운

by 나린

처음 파리에 도착한 날, 비가 내렸다. 공항에서 눈알을 굴리며 두리번거리던 나는, 꼭 엄마를 잃은 어린아이 마냥 불안에 떨었다. 핸드폰 속 지도를 보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두 손으로 힘겹게 들어 올리자 버스 안의 모든 시선은 작은 동양인 여자에게 집중되었다. '주늑들지마. 내가 꿈꾸던 곳에 도착했잖아. 설렘을 만끽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지 않니' 버스를 런웨이 삼아 목표 지점인 좌석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창문 밖으로 타닥타닥 부딪히는 빗방울이 선율이 되어 온 몸을 감쌌다.

낭만의 도시 파리, 습한 비 내음 사이로 몽글거리는 설렘이 피어올랐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덜그럭 거리는 돌길을 힘차게 걸었다. 바닥의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러다 캐리어 바퀴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함께 나의 첫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타지에서 처음 선택한 숙소는 나의 낯섦을 융화시켜줄 만한 정감 넘치는 한인민박이었다. 엄마처럼 푸근한 아주머니께서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는 작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


"아가씨 이게 방 열쇠예요. 처음에는 열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이걸 꾹 누른 다른 힘껏 돌려야 해요. 안 그럼 계속 헛돌아. 오늘 저녁은 6시 반에 내려오면 준비해놓을 거니까 편하게 먹어요. 그리고..."


늘 그렇듯이 게스트하우스 안내를 하던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완벽한 이방인의 신분. 방에는 나 혼자였다. 고요한 적막이 감쌌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해야지....! 파리의 낭만을 느끼러!


작은 가방과 카메라를 양 어깨에 크로스로 메고는 지하철을 타러 역사로 향했다. 긴 지하도 구석구석에서는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자기 몸집보다 큰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소년의 연주 소리에 이끌리듯 그 앞에 멈춰 섰다. 한 곡이 끝나고 나서 보내는 눈짓, 아마도 돈을 달라는 거겠지.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으니 보답을 하라는 건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어 기타 가방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이 정도 낭만이야, 얼마든지 즐겨줄 수 있는 여행 첫날이었다. 물론 앞으로의 여행길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버스킹에 쓰게 될 줄은 나조차도 몰랐지만.


버스킹 소년을 지나쳐 길게 뻗은 지하도를 지나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그제야 전철 승강장이 눈에 보였다. 프랑스 전철에는 에스컬레이터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들고 올라오며 한참을 후회했다지. 다음부터는 꼭 배낭을 메고 오리라! 하고.


사실 처음 마주한 프랑스의 지하철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약간의 꿉꿉함과 온 몸을 휘감는 습기, 그리고 뭐랄까...어두 컴컴함이 풍겼다고 해야 하나. 반짝이고 푸른 낭만의 색깔보단 빛바랜 낭만의 색깔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이미지였다.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다 잠시 공상에 잠겨 탑승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서둘러 사람으로 가득한 전철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이곳의 사람들도 출퇴근 시간 지옥철은 한국과 다르지 않구나.'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마도 사람이 많으니 다음 열차를 이용하라는 말 같았다. 불어였지만, 분명 그런 멘트였으리라. 한참을 문이 열고 닫히기를 반복할 때 마다 전철안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문쪽에 겨우 자리를 잡은 나는 내 소지품 중 가장 고가의 카메라를 품에 안은채 등 뒤에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여행 중 내 몸보다 더 소중히 다루게 될 카메라. 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올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다 여행을 제대로 기록해보겠다는 다짐으로 호기롭게 챙겨 왔다. 초보 여행자의 욕심이 가득 묻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열정으로 가득한 결정이었다고 하자.


행여나 떨어질까 온몸으로 카메라를 사수하던 중 내 시선 정면에 보이는 한 커플이 나를 향해 무언가 말을 했다. 수많은 승객들 사이로 그들의 입모양이 얼핏 얼핏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를 향해하는 말 같은데......


"WHAT?"


나도 입모양으로 힘껏 되물었지만 그들의 불어를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내가 답답했는지 움직이기도 버거운 전철 안에서 겨우겨우 손을 들어 올려 내 뒤를 향해 다급한 듯 손가락질을 했다. 그제야 나는 그들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렸고, 순간 나는 슬로모션이 걸린 사람처럼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어?! 안돼! 잠...깐..!"


초심자의 행운 따위는 없었던 걸까. 가방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오렌지색 지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카메라를 챙기느라 미처 등 뒤에 있던 가방은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다. 눈치를 채고 뒤를 돌았을 때는 한 편의 영화처럼 타이밍 좋게 지하철 문이 닫히고 있었고, 저멀리 두 소녀가 나의 지갑을 가지고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첫 날부터 소매치기라니. 유럽의 소매치기야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이렇게나 빨리 당할 줄은 몰랐다. 조심해야지 여러 번 반복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했건만, 여행지에서 사람은 아주 쉽게 들뜬다. 눈에 담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이다.


비 오는 날의 프랑스에서 소매치기라니. 자칫 나쁜 추억일 수 있었던 이 일은 다행히도 나의 여행의 의미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힘껏 안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긴장으로 가득했던 어깨에 힘을 조금 뺐다. 긴장감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유와 편안함이 번졌다. '풉' 나의 웃음에 눈앞의 커플도 함께 웃었다. 지금의 모든 상황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지갑에 들었던 몇 푼의 현금에 미련이 남기는 했지만 귀한 추억에 지불한 비용이라 생각해야지. 오늘은 두 소녀가 마음 편히 마음껏 원하는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행복한 날이 되기를.


생각보다 금방 여유를 찾았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쉬운 것이었나 할 정도로. 아쉬워할 틈도 없이 몇 번의 터널을 지나니 금새 Trocadero 역에 도착했다. 여행의 의미를 퇴색하기에 터널은 아주 잠시면 된다. 저 멀리 어서 오라며 거대한 몸짓으로 손짓하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우산을 살짝 들어 올려 눈 앞에 에펠탑을 봤다.


'우와-'


짧은 감탄사와 함께,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빗방울과 뒤섞이는 봄을 알리는 따뜻한 온기.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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