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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Sep 30. 2019

까치집의 불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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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 문상을 다녀왔다. 마침 후배 PD가 내일 일정 때문에 오늘 급히 다녀와야 한다고 하기에 옳다구나 묻어서 휑 하니 충남 예산을 찍고 돌아왔다. 그런데 가고 오는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후배님께서 유튜브에 올라온 옛 민중가요를 찾아 듣고 부르며 가자는 제안을 해 준 덕이다. 가고 오는 내내 노래 찾고 부르고 흥얼거리고 묵묵히 듣고를 반복했다. 그 중 둘이 가장 신났던 노래는 <불나비>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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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년 동안 절대시간을 따질 때 도서관에 있던 시간의 세 배, 강의실에서 있던 시간의 두 배는 족히 보낸 집, 기이하게도 동아리와 과와 동문회까지 단골로 섬기던 막걸리집, 학교 와서 과실과 동아리방에 사람이 없어도 그곳에만 가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곳, 그곳의 이름은 까치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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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쯤 전, 서울에서 역사가 오랜 맛집들을 찾아다니던 시절 아이템으로 한 번 엮어 보려고 작가와 함께 까치집을 찾았을 때 주인 아주머니는 변함없이 반겨 주셨다. 하지만 촬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님이 하루에 한 팀이 올까 말까 하다는 아주머니의 서글픈 대답 때문이었다. 허긴 동아리 방에 들러서 술 사준다고 까치집에 가자고 했을 때 후배들 얼굴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리곤 좋아라 따라나오던 후배들에게 갑자기 바쁜 일들이 마구마구 생기기도 했다. 즉 이미 시대의 ‘컨셉’에서 뒤떨어진 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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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집은 마음대로 노래 부르기가 가능한 술집이었다. 그래서 몇 팀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정상적인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었다. 좀 이야기 나누려고 하면 저 옆에서 차이 차~~ 차 차이 차~~~ 시작하고 말문을 여는데 저 구석에서 "선봉에 서서~~~~~"가 터져나오면 그냥 노래 끝나기만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다보면 합창이 되고, 한 몸짓이 되기 일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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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홀을 꽉 메운 각각의 팀들이 술과 노래에 취하던 중 한 테이블의 학생들이 기막힌 노래로 좌중을 압도했다. 쩌렁쩌렁한 행진곡부터 은 쟁반에 옥구슬이 춤추듯 아리따운 여학생의 독창까지, 어느 새 홀은 그들의 리사이틀 무대로 변모해 버렸다. 또 한 번의 절창이 끝났을 때 홀 저 안쪽에서 꽤 학번 높아 뵈는 '노땅'이 목청을 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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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하네. 거기 무슨 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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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던 장내가 일순 가라앉았는데 이 명창들은 그냥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성미가 좀 급한 편인 듯 했던 '노땅'이 무슨 과냐고 재우쳐 물으니 옥구슬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리고는 아주 잠깐 망설인 뒤 그녀는 유쾌하게 외쳤다. "청계대학 피복과입니다. 청계천 피복노조 노조원들입니다!"


그 날 학교에서 있었던 집회에 참석한 후 뒷풀이를 왔던 청계천 피복 노조원들이었다. 찰나라고 하기엔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장내는 조용했다. 그러나 웬지 모를 미안함이랄까, 뜻밖의 당황스러움이랄까, 그 묘한 느낌이 빚어낸 침묵은 청계대학 피복학과 학생들이 시작한 노래 한 곡으로 일거에 격퇴되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잠시 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악을 쓰며 내 목아 찢어져라 절규하듯 함께 불렀다.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나는 그때 그들처럼 <불나비>를 멋지게 부른 사람들을 이후로나 이전으로나 본 적이 없다.


2005년, 청계천은 환골탈태를 거쳤다. 하늘을 아스팔트로 가렸던 고가도로는 간데 없고 물고기가 노니는 물에 수십만 명이 발을 담갔다. 그 즐거운 변화의 흐름 속에서 느닷없게도 제 귀에는 까치집에서 마주쳤던 청계 대학 피복학과 학생들의 노래 '불나비'가 쟁쟁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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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서.... 까치집을 촬영하려고 이모저모를 알아보던 중 까치집 아주머니에게 뭔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는가를 물었을 때 아주머니는 주방 안 찬장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오셨다. 그건 80년대의 외상 장부와 학생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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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놈들은 10만원 외상 갚으면서 15만원어치 외상을 긁는 만행을 저질렀고, 어떤 학술 동아리는 외상 20만원을 남긴 채 해체되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 줄지은 이름 가운데에선 익히 낯익은 이들도 많았다. 한동안 눈에 불을 켜고 장부야 뚫어져라 뭔가를 찾던 작가가 좋아라 소리를 쳤다.


“형민 PD도 여기 있네요.”
“무슨 소리야 난 외상값 없어.”
"찬란하게 빛나네 이름 석 자, 김형민 4만원"


학생증들 속 젊디 젊은 사진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한때 대표하던 종이조각들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포동포동 살찐 생쥐도 출몰하는 바람에 세련되고 깔끔한 후배들은 칠색팔색을 하며 자리하기를 거부하던 곳이고, '없어져도 벌써 없어져야 마땅했던 곳이었고 그 이후 머지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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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좀체 잊어버리기 힘든, 그리고 어쩌면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서려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원 전의 청계천, 그 사연 많고 한 많았던 이름처럼. 어느날 대학교를 찾았던 청계 피복 노조원들의 <불나비> 합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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