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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Oct 08. 2019

문래동의 나팔꽃

문래동의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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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개띠라 그런지 틈이 나면 발발거리고 돌아나기를 참 좋아한다. 집에 있으면 병나는 스타일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입을 딱 벌릴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이곳저곳 골목 이모저모를 기웃거리며 걷기를 즐긴다. 지난 주에는 신도림동까지 걸어서 볼일을 보고 다시 문래동 일대를 두루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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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은 여러 얼굴을 가진 동네다. 거기서 몇 년을 살았지만 못봤던 풍경들이 많다. 꽤 번듯한 아파트촌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 쇠 깎아온 공장의 쇠 냄새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 냄새가 그득한 곳이고 공장 사이로 파고든 예술촌과 함께 예쁘고 특색있는 까페며 음식점이 꽤 자리잡은 사이로 70년대 영화를 찍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좁고 남루한 골목길들이 거미줄처럼 뻗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번 걸음에는 그 일대를 비껴 나갔기에 지금도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손바닥만한 방과 아기 발바닥만한 부엌으로 된 단칸방들이 수백 개 다닥다닥 붙은 벌집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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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전 <긴급출동 SOS 24> PD 노릇을 하던 시절, 문래동에서 제보가 왔다는 소식에 반색을 하며 헌팅을 나섰다. 살던 집 바로 뒷동네이니 이게 무슨 땡잡은 아이템이란 말인가. 마실 삼아 나가 촬영하고 힘들면 집에 와서 쉴 수 있는 꿈의 아이템이라니. 제보자는 철공소들과 벌집촌 사이쯤 있던 식당 아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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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이 있어서 그래요. 부부가 좀 이상해. 둘이 캐나다 이민 준비한다고 애들 학교도 안 보내는데 집에서 나오지를 않아. 동사무소에 신고해서 복지사가 나가 봤는데 남편하고 남편 누나인가만 있고 여자하고 애들 둘은 도무지 만날 수가 없다는 거야. 같이 안 산다고 우기고. 애들이 절대 집 밖에 안 나오는데 집 안에도 없다니 이상하지 않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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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 복지사를 만나 보니 얘기는 비슷했다. 자신도 벌집 하나에 이상한 가족이 있다는 제보를 몇 번 받았고 연락 없이 불시에 방문도 해 봤는데 애들은 없었다는 거였다. 동사무 소를 나오는데 식당 아주머니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애들이 분명히 집안에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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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촌으로 달려가서 문제의 집 문을 두드렸다. 코딱지만한 부엌이 있고 방 하나 있는 공간. 약간 지적장애가 있어 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다. 문제의 남편의 누나인 듯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안 살림이라곤 서랍장을 겨우 면한 장롱 하나. TV 하나 냉장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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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휑했고 인기척은 없었다. 장롱에 눈이 가긴 했는데 거기에 30대 여자 하나랑 초등학생 둘이 들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크기였다. 누구네 집 아니냐고 묻는 척한 주제에 장롱을 열어 볼 수도 없었지만 열어 볼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 뒤 몇 시간 동안 그 벌집을 주시했으나 남자가 들어온 것 말고는 그 집에선 다섯 식구가 복작거린다는 어떤 낌새도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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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엔 아예 봉고차를 대 놓고 집을 주시했는데 밖에 나오는 건 남자와 그 누나 정도일 뿐, 세 명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렇게 인기척이 없을 수는 없다 싶어 그냥 철수했는데 달포 뒤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아이템을 찾아 헤매던 후배가 내가 다녀왔던 미스테리의 벌집 얘기를 듣고 다시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애들과 엄마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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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사와 함께 뭘 조사한다는 핑계로 방안에 들어가서는 이불은 있으신가 하면서 장롱을 열었더니 그 서랍장같은 장롱 안에 세 명이 숨죽여 포개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기척만 나면 내 키보다도 훨씬 작은 낡은 장롱에 뛰어들어 야무지게 문을 닫고 숨조차 죽이는 생활을 몇 년 째 해 왔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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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 같아요. 캐나다 이민도 망상이고.... 아무튼 캐나다 갈 기회가 곧 오는데 나라에서 학교를 보내라고 하면 캐나다에 못 가니까 애들을 숨겼다는 거고, 나오지도 않았던 거고, 인기척만 나면 번개같이 숨는데 숙달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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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정신병. 즉 고립된 상황에서 망상 체계를 공유하면서 지배적 우위에 선 사람의 망상이 하위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식되는 상황이었다. 다섯 식구가 누워 자기조차 힘든 벌집 하나에서도 아내와 두 아이들은 하루의 반을 장롱 안에서 보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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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집을 찾았을 때는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미칠 것 같은 더위 속에서 아이 둘과 엄마는 불덩이같은 서로의 몸을 부둥켜 안고서 행여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사람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은 공간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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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할 건덕지도 없어서 아동학대예방센터 부르고 동사무소 지원 받아 애들 격리하는 것으로 상황 종료 시키고 왔다는 후배에게 애들과 엄마 반응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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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밖에 나오는 게 익숙지 않아 보였어요. 그 좁아터진 방이 넓어 보이는 느낌? 어디 몸 둘 데를 모르고 불안해 하더라고요.” .


어차피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 그 장롱은 최후의 피신처였을 것이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피난처였으리라. 오작동하는 머리가 빚어낸 절박함은 그 좁은 공간에서 세 명이 포개지는 괴로움과 찌는 듯한 더위와 숨막히는 압박감을 넘어서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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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야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가끔 어른 하나와 초등학생 둘이 숨었던 내 가슴 높이의 장롱을 떠올리면 슬몃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사람은 대관절 어느 정도의 절박함 앞에서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아서다. 또 우리 사회가 마음의 병이라고는 일 점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런 절박함과 인내력(?)을 선사하고 있는 현장들이 곳곳에서 떠올라서다. 강남역 근처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용희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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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연대하자고, 그를 지지하자고 말하고픈 깜냥은 없고, 왜 촛불이 그들을 향하지 않느냐고 호령할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 다만 두 발을 쭉 뻗지도 못할 공간에서 몇 달을 버티며 호소하고 있는 나이 환갑의 사내의 절박함에 그저 안타까운 소름이 돋을 뿐이다. 왜 우리 사회는 저 절박함을 풀어주기는 고사하고 중재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까.


농성장을 방문했을 때 그의 사연을 들으며 참 애매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김용희씨는 목숨을 걸만큼 완강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조율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양쪽을 설득하고 압박해서 전부가 어렵다면 부분이라도 취하고, 승리가 아니라면 무승부라도 이끌어내는 게 맞지 않을까. 어떻게든 절박함을 덜고 공포를 줄여 허공 위에서 땅 위로 내려오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 노력이 기울여지는 게 정상적인 사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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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사연이 많은 사회는 각박하고 척박할 수 밖에 없다. 공포에 찬 사람들은 극단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건 비단 김용희씨 문제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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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전 문래동 벌집촌 장롱 속의 아이들은 지금쯤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공포와 절박함으로부터 벗어났을까. 이제는 성인이 돼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했음직한 나이들이 되었는데. 문래동은 바뀌었으되 아직도 여전하고 공장 지대 골목길에는 도심에서 보기 힘든 나팔꽃이 피어 있었다. 아이들이 살던 벌집촌 골목에도 꽃들은 피었을까. 아이들은 그 꽃을 볼 여유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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