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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Sep 29. 2022

#6 1960년대 중국

중국의 MiG-21, Chengdu J-7 Fishcan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1959년 중소 결렬 이후 중국과 소련이 곧바로 모든 교류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냉전의 차가움이 극에 달했을 때 소련은 중국의 지원을 얻고자 다시 중국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런 의미로 MiG-21의 면허 생산권을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기 전에 나름 최신예 기체였던 MiG-21 면허 생산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1962년부터 면허 생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1950년대 초반에 비해 소련은 중국에게 설계도만 제공해줄 뿐 핵심 부품이나 자료 등은 제공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마오쩌둥에게도 보고되었고 그는 이러한 소련의 불성실한 태도에 실망하며 큰 배신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1962년에 소련이 중국과 인도 사이에 벌어진 중인 국경 분쟁에서 인도를 지지하자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다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중국은 소련이 자국 내에 남겨둔 일부 자료들만을 가지고 MiG-21을 생산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점은 소련이 중국에게 제공한 MiG-21이 그렇게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기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련이 중국에게 제공한 기체는 MiG-21F-13이었는데 해당 기체에는 오늘날 전투기에는 당연하게 탑재되는 레이더 조차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 초기 MiG-21과 함께 중국에서 생산된 J-7 초기형을 보면 기체의 앞부분이 작고 조종석 뒤가 얇으며 전체적으로 날렵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공기흡입구 안 쇼크콘(shock cone) 내부에 레이더를 수납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외형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엔진도 MiG-21의 경우 수명이 짧고 구조가 간단한 Tumansky R-11 터보제트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다. 특히 R-11 엔진은 MiG-19에 탑재된 R-9 엔진을 개량한 엔진이었는데, 중국은 앞서 MiG-19에 탑재되는 R-9 터보제트 엔진을 WP-6이라는 이름으로 면허 생산한 경험이 있어 역설계하는데 조금이나마 수월했을 것이다. 덕분에 역설계를 맡은 선양항공산업집단은 과거 MiG-15부터 MiG-19등 다양한 소련 항공기들을 면허 생산한 경험을 바탕으로 MiG-21의 역설계에 성공했고 이후 1964년 3월부터 R-11 터보제트 엔진은 WP-7이라는 이름으로, MiG-21은 J-7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을 시작했다.


특히, J-7은 중국이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지 않고 나름 독자적으로 설계한 기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따라서 중국은 MiG-21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몇 가지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먼저 소련의 초기 MiG-21은 한정된 동체 내부에 커다란 R-11 엔진을 넣으려다 보니 연료 탱크가 기체의 무게 중심 앞켠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무게 중심 앞켠에 위치한 연료탱크는 그 안의 연료량이 일정량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기체의 안정성이 크게 저하되는 치명적인 설계상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J-7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하였고 1980년대에는 F-7A라는 이름으로 이집트를 포함한 아프리카 국가들과 방글라데시 같은 여러 아시아 공산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전투기를 수출하였다. 이처럼 중국은 J-7과 이 안의 R-11 엔진을 역설계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력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이는 훗날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MiG-21은 중국이 역설계에 도전해볼 만할 정도로 기체의 구조가 단순했으므로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게다가 중국에 비해 탄탄한 기술력을 가져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MiG-21을 개량할 수 있었던 소련과 다르게 중국은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J-7을 제때 개량하지 못한 채 1970년대 항공산업의 암흑기를 걷게 된다.


 J-7의 역설계가 마무리되고 양산에 들어갈 무렵, 1966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혁명 자체는 1969년에 종결되었으나 그 여파는 마오쩌둥이 죽는 1976년까지 지속되어 중국의 항공산업은 물론이며 산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1966년에 첫 비행에 성공한 J-7은 1967년 여름부터 양산에 들어갔음에도 중국 인민해방공군에는 1970년이 다 되어서야 인도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항공기들의 교체 및 개발 사업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친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지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중국은 문화 대혁명으로 항공전력을 교체해야 하는 시기를 놓쳤고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에 비해 항공 전력이 굉장히 퇴보하고 말았다.


추가로,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로 피해를 본 것은 전투기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1960년에 소련으로부터 Antonov An-12 Cub 수송기를 들여오는 중이었는데 해당 항공기 역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도입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1972년 An-12 역설계를 마치면서 1974년부터 Y-8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이 시작되어 초도비행까지 마쳤다. 이후 Y-8은 중국 항공기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Y-8은 수송기로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AEWC), 전자전기 그리고 대잠 초계기 등 다양한 형태로 개조되었으며 2002년부터 Y-8X 프로그램을 통해 Y-9로 개량되어 오늘날에도 현역으로 생산되고 운용 중인 기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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