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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y 14. 2024

천천히 걸어야 만끽하는 즐거움

   일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누라, 막내딸과 모처럼 달맞이언덕으로 밤 산책을 다녀왔다. 토, 일요일엔 헬스장이 8시면 문을 닫는 바람에 식사 후 꼼짝달싹 안 하다가 슬그머니 침대로 기어들어가는 남편 행상머리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마누라가 내린 조치였다. 등 떠밀어 나가는 산책이 기분 내킬 리 없었으나 두 여자 등쌀에 뻗대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끌려나가다시피 나섰다.

   달맞이언덕이 곧 뒷동산인 동네는 해운대 신시가지 내에서도 가장 풍경 좋고 공기가 맑다고 자부한다. 조성된 지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녹지는 우거질 대로 우거져 수목원이 부럽지 않고 역세권에서 살짝 떨어진 덕에 한적하기는 또 그만이다. 그런 동네 뒷배로 달맞이언덕이 딱 버티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입지가 또 어디 있으랴. 역세권에다 신축인 고급 아파트인들 다 좋은 건 아니다. 주변이 무르익어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안락하다고 느끼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보금자리이다.

   해월정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 차가 다니는 이차선 도로 곁 조붓한 산책로에는 조명이 은은하게 빛났다. 전에는 못 보던 거라 의아해하니 애저녁에 꾸며진 건데 밤에 안 다녀봐서 모르는 거라고 막내딸이 핀잔을 줬다. 그러면서 아빠 좋아하는 노래나 듣자며 스마트폰을 꺼내 「일기예보 2집」에 수록되어 있는 <떠나려는 그대를>을 틀었다. 엄마 아빠 팔짱을 동시에 끼고서는. 

   막내딸이 틀어준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 밤 산책은 의외로 아기자기했다. 유별날 것 없어서 평소 같으면 스치고 지나쳤을 풍경이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어 집구석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도란도란함을 연출했다.


​   ​차를 탄 사람의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추상화에 가깝지만, 걷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세밀화와 같다.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가 모조리 다 기억난다.(김중혁 소설가)​


​   천천히 걸어야 만끽하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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