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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19. 2024

자괴감

   염색약 바르고 20분쯤 지나면 머리를 감긴다. 염색약이 고급이면 대기 시간은 10분으로 준다. 하지만 염색한 머리를 너무 일찍 감은 나머지 며칠 안 가 물이 빠졌다는 손님 항의가 일전에 있어서 품질 좋은 고급 염색약을 써도 원래 대기 시간보다 5~10분 더 늘린 지 좀 됐다. 하여 그제 오전 고급 염색약을 바른 손님한테 대기 시간 20분을 넉넉하게 채운 뒤 머리 감기려고 세면장으로 안내하는 깎새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바람직했다. 

   - 일전에도 벚꽃 피듯이 군데군데 허옇게 색이 빠져 열 받았구만 오늘도 20분 만에 머리를 감자고? 천하 없는 고급 염색약이래도 40분은 지나야 겨우 물을 들까 말까 해 이 양반아.

   염색한 지 30년이 넘어 염색약이라면 도가 텄다면서 전에도 염색약 바르고 40분 넘게 기다리기를 고집하는 유별난 손님임을 항의를 듣고서야 알아챈 게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 제 점방에서는 통상적으로 20분 지나면 예외없이 머리를 감기기 때문에 말씀드린 건데 손님이 정 더 기다리시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돌아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망증이 지독한 깎새가 이 손님인 줄 모르고 다음에도 20분 만에 머리 감자고 채근했다가 무슨 우사를 또 당할지 모르겠다 두려워져서 손님한테 되돌아가서 말을 걸었다.

   - 찾아 주시는 손님이 많다 보니 일일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니 다음번에 오시거든 40분 이상 기다렸다가 머리 감겠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십시오.  

   나름대로 공손히 당부한 건데 노발대발하는 반응이 돌아와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었다. 정당하게 항의한 손님한테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내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는 주장이었다. 한번은 마누라가 주의를 줬다. 마스크로 가린다 한들 사람 감정은 얼굴에 표가 다 나게 되어 있다고. 아마 당부조인 말투와는 달리 마스크 위로 치솟은 쌍심지가 영 달갑잖았던 손님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깎새는 좀 억울했다. 20분 뒤 머리를 감는 점방 룰을 공지했다고 버럭 소리부터 지른 이는 손님이었다. 물론 자기 머리에 들인 염색이 일찍 빠지는 원인이 깎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손님의 일방적 언사에 빈정 상한 깎새가 감정의 찌끼를 미처 다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우를 범해 그 사달이 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건 뼈아프지만 다음번에 조심하겠으니 당신도 협조해 달라는 상부상조를 외로 트는 손님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근자에 손님과 말다툼을 벌이는 불상사가 부쩍 잦아졌다. 사람 상대로 하는 장사치 입장에서 참을 인忍 자를 붙이고 다녀도 시원찮을 테지만 굴곡 심한 감정선에 기질까지 성말라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게 큰 문제다.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대거리를 마다치 않으면 목은 금세 쉬어 쇳소리가 나고 아침마다 복용하는 혈압약이 무색하게 급류를 탄 핏줄기가 전신을 휘감아 도는 바람에 흥분 상태는 극으로 치닫는다. 그러다 모든 상황이 일단락이 되면 불현듯 신물이 치밀어 오르면서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허탈감에 오물을 뒤집어쓴 양 기분 다랍다. 이런 식의 감정 소모전, 진절머리가 난다. 

   - 선생님,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하고요, 제가 다시 또박또박 말씀드릴께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며 태세를 바꾸는 손님 동태를 확인한 뒤에) 찾아 주시는 손님이 많다 보니 일일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똑같은 실수 저지를 수 있으니 다음번에 오시거든 40분 이상 기다렸다가 머리 감겠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참겠다고 해서 참은 게 아니다. 자꾸 시비가 붙다간 남아날 손님이 없을 뿐더러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겁이 덜컥 나서였다. 불화로 인한 감정 소모가 끼치는 악영향을 '장사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자조적 조롱으로 꼴바꿈시킨들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 애환을 모두 꺼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꼴 당하려고 장사하는 건 아닌데' 자괴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애를 먹긴 점방 차린 지 2년 4개월 만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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