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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Nov 04. 2024

생일 선물

   다가올 목요일은 막내딸 생일이다. 무탈하게 잘 컸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생일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도 따 주고 싶어 안달인 깎새이지만 정말이지 마음뿐인지라 가진 것 별로 없어 해 줄 게 별로 없는 찌질한 아비로 새삼 들통나는 게 그 무엇보다 부끄러운 깎새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만 원짜리 댓 장 찔러주는 게 다일 텐데도 "뭐든 말해.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어?" 기어이 허세를 부리는 꼴불견을 엊그제 연출하고야 만다. 

   "파마 해줘, 아빠가."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아빠 전공이 아니라서 그건 좀 곤란한데."

   입술을 삐죽 내밀지만 눈웃음 살포시 머금은 눈매로 미루어 크게 실망한 성싶진 않았다. 녀석, 아비를 가지고 놀 나이가 되었나 벌써? 

   생일 선물을 금일봉으로 오역하지 말기를 바라면서도 선뜻 다른 걸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이중성이 가증스럽지만 깎새도 한때는 감수성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풍부했더랬다. 건네받고 건네주는 생일 선물이 품고 있을 내밀한 의미에 가슴설레던 낭만이야말로 청춘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생일 선물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건 LP였다. 대학 시절 첫사랑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LP, 파내지 않고서는 끝내 관 속으로 함께 묻혀질 영원한 추억이다. 

   조지 윈스턴은 가뜩이나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던 사내아이를 아주 들이쑤셨다.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였던 음악가는 그가 쓴 곡에 경건한 종교적 색채를 흠씬 배게 했고 자연을 닮은 서정성까지 더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으로 하여금 구원이라는 단어와 친숙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그 작자 앨범이 나왔다 하면 곧잘 사 모았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입 준비로 멀어졌던 조지 윈스턴과 재회한 건 대학 2학년이던 1992년 생일 무렵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연애라는 걸 하다 보면 시시콜콜한 신변잡사까지 아기자기하게 노닥거렸을 테지만 조지 윈스턴 음악이 화제의 중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 사귀던 여자는 <December> LP를 생일 선물로 건넸다 놀랍게도. 생일 선물로 LP를 받았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말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읽어내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기꺼움이 더 벅차서 그녀를 꼬옥 껴안아준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조지 윈스턴 LP가 깎새의 젊은 한때를 수놓았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2년만 사랑했던 그니는 LP로만 생일 선물을 때웠다. 조지 윈스턴 LP는 두 번째로 받았던 거였고 맨 처음 생일 선물로 받은 LP는 록밴드 익스트림이 노래한 'More Than Words'란 곡이 삽입되어 있던 MIX 앨범. 영어사전(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을 뒤지면서 그 노래가 끼어 있는 LP를 선물로 택한 뉘앙스를 해석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더랬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짓을 일껏 벌였던 건 선물에 담긴 은근한 의도에 마음 설렜던 까닭이겠다. 

   이별 통보하는 것조차 사치스럽다고 여겼는지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버린 탓에 당연한 얘기지만 상대방이 헤어져선 아니 되는 이의제기를 할 기회조차 박탈한, 영원히 빠지지 않을 대못을 박은 박절하고 모진 사람. 어찌나 큰 변고였던지 그 뒤로 얼마 동안은 여자를 향한 증오로 불타올랐다가 그 증오가 타고 남은 자리에 그리움이 움텄으며 그런 감정들이 뒤섞이고 변주되어 끝내 복잡다단한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게끔 가능성의 지평을 넓힌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 노래 제목따나 말 그 이상(More Than Words)을 심어주고 간 사람. 그러고 보면 실연도 사랑만큼 '사람다움'을 배양하는 값진 요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 곁에는 취향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비록 밥도 쌀도 아니겠지만.(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생일 선물 얘기하다 느자구없이 여기까지 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gSpU0X3a9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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