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방을 연 지 3년째. 그간 머리카락 뒤집어써 가며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건 아니다. 돈을 효과적으로 더 많이 벌기 위해 커트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나름대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을 테고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인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처세의 지혜까지 덤으로 각성한 건 특별한 행운이다.
말머리가 거창해 대단한 뭔가가 나올 성싶겠지만 그런 기대는 접어 두라고 미리 밝히는 바이다. 다만, 여지껏 모르고 살았건 알았어도 외면했건 간에 아무튼 무척 유용한 지혜라고 깨닫자 망설이지 않고 이를 체득했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자평한다.
개업하고 얼마 안 지났을 무렵이다. 일반염색은 바르고 20분을 기다린 뒤 샴푸를 해야 해서 다음 손님을 응대하는 데 여유가 있다. 한 손님이 일반염색을 주문했다가 고급염색으로 마음을 바꿨다. 7천 원하는 일반염색을 1만5천 원짜리 고급염색으로 바꾸면 두 배 장사이니 깎새로서는 '땡큐!'다. 정성을 다해 염색약을 바르고 있는데 사자머리를 한 손님이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치로 봐선 바짝 올려 깎는 스포츠형을 주문할 성싶었다. 예상이 적중하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도포를 막 끝낸 고급염색은 일반염색에 비해 대기 시간이 절반으로 준다. 즉 10분 이내로 머리를 감겨야 한다. 고급염색 사용 매뉴얼에 충실하자면 5분 이내이어야 하지만 좀 더 오래 물이 들으라고 자체적으로 5분을 더 연장한다. 그럼에도 고급염색 대기 시간 10분은 길다. 민감성 피부를 가진 손님 중에 두피 트러블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어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는 게 신상에 이롭다.
고급염색 손님 머리를 감기기까지 10분 남았다. 그 시간 안에 사자머리를 스포츠로 깎아낼 것인가 아니면 염색 손님을 우선해 사자머리를 10분 이상 대기시킬 것인가. 작업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진 지금이야 고민 축에도 못 끼지만 신출내기였던 당시만 해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과감하게 전자를 선택한 깎새는 거침없이 커트보를 두르고 바리캉을 집어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10분 안에 커트를 끝내자마자 고급염색 손님을 이끌고 세면장으로 곧장 돌입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조급하니 몸도 따라 경거망동해졌다. 커트하는 깎새 뒷모습이 마치 엉덩이에 불이 붙은 망아지나 진배없었으니까. 가까스로 시간 안에 커트를 마친 뒤 그길로 고급염색 손님을 세면장으로 데려가 머리를 감겼다. 모든 걸 지체없이 끝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으로 자못 우쭐해졌다. 신속하다는 건 일에 효율화를 꾀할 강력한 무기를 보유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손놀림이 빨라졌다는 의미로 통하니 점점 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자뻑을 안 했으면 거짓말이고.
요금 지불까지 마쳐 볼일을 다 끝냈는데도 고급염색 손님은 그냥 퇴장하지 않았다. 깎새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면서 툭 내던졌다.
"주인양반, 뭐가 그리 급해요? 머리 깎는 걸 뒤에서 보니 정신이 다 없습디다. 그래 가지고서야 손님이 불안해서 자기 머리를 맡기겠소?"
이 모든 게 다 당신 위해서, 10분 안에 당신 머리 감기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호들갑을 떨었건만 돌아오는 거라고는 매운 타박뿐이라 야속하기 그지없었지만 앞으로는 주의하겠다는 말만 연신 주워섬겼을 뿐이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깎새를 일깨웠다. 아마 장사를 접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남아 초심이 흔들릴 적마다 채찍질을 해댈 게 분명하다. 그간 착각하고 살았던 게다. 신속성이 효율성이랄지 전문성과 정비례 관계가 아닐 수 있다는 회의가 일었다. 뜻밖의 계기로 인해 당연하다고 여기던 게 전혀 당연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러선 모든 걸 의심해봐야 한다. 고급염색 손님이 먼저냐커트 손님이 먼저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부터가 장사치로서는 함량 미달인 사고방식이었다. 방법을 찾자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성을 들여 커트를 하다가 머리 감을 때가 임박하면 커트 손님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고급염색 손님 머리를 감겨도 큰 무리가 없었다. 신속하진 못하지만 성실한 태도로 양 손님에게 부족함이 없는 균형 잡힌 일솜씨가 더 큰 호감으로 각인되었을 게다. 도道가 없는 술術은 한낱 잡기에 불과할 뿐이거늘.
아마 그 뒤부터이지 싶다. 장사에 임해 깎새가 중요하게 삼은 모토는 '쇠뿔도 단김에 빼'기보다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신중함이다. 손님들로 대기석이 북적거리고 염색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뤄도 눈앞에 직면한 손님에 집중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만에 하나 지연이 될 성부르면 사정을 손님에게 소상히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그걸 단박에 거절하는 박절한 손님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하여 신중함은 만사형통이고 변절할 리 없는 상도이면서 처세의 지혜로 유용하다.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즐겨 사용하던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