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머리를 밀어달라고 파격적인 주문을 하면 우선 그 면상을 슬쩍 살피고 시작한다. 심상찮아서이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애지중지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민머리가 개의치 않을 때는 신상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는 의미일 수 있어 조심스러워진다. 뭇사람들한테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해 극적 효과를 노릴 요량으로 삭발 카드를 꺼내 드는 철없는 젊은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주변 무관심을 자충수로 돌파하려는 수작이니 엄청난 충격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아무튼 진중 모드로 손님을 살피는 깎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도 신중을 기한다. 출가를 위해서든 수술을 위해서든 삭발엔 늘 비장미가 따라나오기 마련인지라.
점잖은 상고머리를 늘 고수하던 과묵한 노인. 반듯한 언행과 단정한 두발이 참 잘 어울리는 노인은 매달 중순께 어김없이 점방을 찾았다. '더 있다 오셔도 되는데'라는 꺼내 봐야 손해만 볼 인사치레만 입 안에서 맴맴 돌곤 했다. 그때도 평소와 다름없을 줄 알았는데,
- 다 밀어줘요.
- 혹시 병원 수술이라도 잡혀 있습니까 어르신?
- 그건 아니고, 약을 먹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서 보기가 싫어.
- 약이 독한가 보죠?
- ···.
바리캉 날을 가장 짧게 조정한 다음에도 선뜻 머리에 갖다 대지 못하고 망설이는 깎새.
- 윗머리는 살려 두고 옆과 뒤만 바짝 미는 건 어떨까요?
- 그냥 다 밀어줘요. 추접은 꼴 내가 못 봐줘서 그러니.
- 많이 불편하세요? 아직 정정하신데.
- 나이 많이 먹었수다. 43년생이면 오래 살았지.
나이는 불길한 암시였다. 과묵하고 점잖은 노인은 삭발한 노승처럼 휑한 두상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요금을 치른 뒤 담담하게 자리를 뜨는 노인 뒷모습이 처연했다. 이후로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