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석에서 기다리던 노인이 선반 위 책 한 권을 집어들더니 책날개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자기 차례가 되어 이발의자에 앉은 노인이 "신영복 알아요?" 전라남도 말투로 물었다. 그가 집어든 책은 『담론』(신영복, 돌베개, 2015)이었다.
-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존경하는 선생이십니다.
- 문재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신영복을 꼽았다지?
- ?
- 박정희 시절에 간첩으로 잡혀간 신영복을 존경한다니까 문재인은 공산주의자이지.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 신영복 존경한다니까, 문재인이 공산주의자니까.
- 존경하는 선생 책을 내가 읽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방심하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양 잠시동안 얼얼했던 깎새였다. 깎새 점방을 드나드는 손님 중 전라남도 출신이 제법 많다. 정치적 성향을 일일이 물어보진 않았으나 여수·순천 사건으로부터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불행한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사는 이들인지라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이는 봤어도 극우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낸 자는 없었다. 그러니 노인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경악하고 심기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신 나간 노인한테 따져 묻고 싶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나라 망친 공산주의자 전前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했던 자가 쓴 책을 읽는다는 건 너도 문재인과 다를 바 없다는 건데,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구체적 근거는 무엇인가. 노인은 과연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한 신영복이 쓴 책을 단 한 권, 단 한 페이지라도 읽어보긴 했는지, 선생이 쓴 책에서 공산주의를 고무, 찬양하며 그로 인해 사람을 빨갛게 물들게 세뇌시키는 대목이 어디에 있는지 조목조목 대보라고도 분연히 묻고 싶었다. 덧붙여 21세기 대명천지 한반도에서 시대착오적 정치 망상으로 도대체 무엇을 꾀하려는지, 노인이 음흉하게 노리는 게 무엇인지도 묻고 싶었다. 정신 나간 노인이 늘어놓은 주장 대로라면 공산주의자인 신영복을 존경하는 문재인이 공산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 신영복이 쓴 책을 읽은 깎새도 공산주의자이어야겠지만, 똑똑히 밝히겠는데 안타깝게도 깎새는 아나키스트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온고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溫의 의미를 온존溫存의 뜻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이 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신영복, 『강의』, 논어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