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일요일(183)

by 김대일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더 추락할 데가 없을 때까지 추락해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용서할 테다. 그러니 미치도록 비참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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