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헤아리다

by 김대일

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양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다. 즉 '양화量化'될 수 있다. 예컨대 베르그송 말대로 시간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변이하는 흐름이고 '순수지속'이지만,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시계바늘의 공간적인 양을 통해서 '양화'될 수 있다(『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지적 능력은 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점수로 지표화되는 성적을 통해서 양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있게 된다.(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126쪽)



이 대목에서 바로 떠오른 건 어릴 적 방학 시즌만 되면 습관처럼 그리던 생활계획표였다. 하루를 촘촘하게 나누던 일일계획표, 한 달 남짓 되는 방학을 유익하게 보내겠다는 포부로 설계한 월간계획표 따위. 그걸 떠올리면 시간은 양적으로 세거나 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란 표현은 체념론적 발상으로밖엔 안 들리고 대신 '시간을 쪼갠다'는 억척이 건설적이다. 그렇게 유의미한 가치를 장착한 양화된 시간을 촘촘히 쌓아 나가다 보면 '여한'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느긋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단, 날마다 늦잠만 자는 잠꾸러기한테는 그려 놓은 계획표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 요는 실천하느냐 마느냐다.

양화된 시간에 이어 곧장 '점수로 지표화되는 성적'을 기술한 것은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절묘하다. 이왕에 시간을 양화시켰으면 어떻게 얼마나 양화시켰는지 그 사후적 평가 또한 양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쉽게 말해 우물쭈물하다가 시간 낭비하지 말란 소리겠다.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오역이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지" 쯤으로 번역하면 과하지 않다. 제대로 옮겼더니 오역과는 상반된 의미로 읽힌다. 모르긴 몰라도 고인은 자기가 양화시킨 시간에 충분히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고 자부해 이 묘비명을 남겼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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