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도 모자라 대학교까지 같은 데를 나온 동기들 중 술자리에서 만나기만 하면 거의 톰과 제리 수준이던 강과 곽. 들어보면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남발해 듣는 이로 하여금 인내력 시험에 들게 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를 영어 이름으로 붙여도 잘 어울릴 법한 강, 지상가상없이 떠드는 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도도하게 흘러갈 것만 같던 강의 수다의 강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 먹은 뒤 거기다 방죽을 쌓아 버리고 마는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강을 물 먹이는 것을 인생의 참재미로 여기는 성싶은 곽.
한 10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모처럼 명절 연휴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둘 다 능력 출중하여 들어간 대기업에서 중견으로 자리잡아 무탈하게 근속을 이어가서인지 면상에 '안정'이란 두 글자가 안정적으로 박혀 번드르르했고 제법 의젓한 풍채엔 중후미까지 장착되어 술자리를 겸한 만찬 역시 고상한 기품으로 흘러넘치나 싶었지만, 애저녁에 눈치는 쌈 싸 드시고 예의 TMI를 유감없이 남발하는 강은 사라는 술 대신에 빈축만 일껏 사고 앉았다. 시종이 여일하기가 참 힘든 세태에 그 한결같음이 기특하긴 하나 오늘은 또 얼마나 장황해질지 두려움부터 앞섰더랬다.
무람없이 줄줄 튀어나오는 TMI엔 강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있다. 과시욕이다.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 장남이라는 핸디캡은 책임감 무겁고 적자생존만이 살 길이라는 독기를 품은 산업 전사로 거듭나 지금의 늠름한 강을 추동해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중간간부로 승승장구하기에 이르렀고 충분히 타의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안타까운 점은 그러한 입지전적인 역정을 고진감래하는 인생으로 부각시키는 배경으로만 활용하면 좋았으련만 한번 취하면 헤어나기가 어려운 자뻑이란 유혹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말았으니 오호통재라. 강 입장에서야 뭔 대수겠냐 싶을 테지만 그 유혹에서 비롯된 부작용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바늘 가는 데 실 가고 바람 가는 데 구름 가는 격으로 강하면 따라오는 이미지로 굳어진 지 이미 오래다. 원래 무딘 건지 아는데도 눈치껏 무딘 척하는 건지 그 눈치없음이 강의 치명적이라면 치명적인 흠이다.
자랑질이라는 게 때와 장소, 청취하는 자들만 잘 가린다면 자기PR의 효과적인 기제로써 타인으로부터 선망과 동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한 끗 차이로 과유불급이면, 재수없다는 쑥덕거림에 귀만 간지러울 뿐인 벼랑 끝 전술이다. 강이 주변 반응을 슬쩍슬쩍 곁눈질해가며 조신하게 거들먹거리다가 어느새 눈가에 회심의 잔주름이 지면서 참기름을 처바른 듯 톤이 능글능글해지면 돌아올 수 없는 과유불급의 강을 건넌 셈이다. 공학도 출신인 강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로 알려진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는 한국사검정 1급이 안 부럽다. 세계 4대 오페라를 오리지널로 섭렵했노라 너스레를 부리면 만만찮았을 문화비를 감당하고도 거뜬한 경제력을 갖춘 강이 부러우면서도 기가 눌렸더랬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강의 진면목에 자극받아 '이제부터라도 강 못지않은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테야!'라고 가랑이 찢어질 게 뻔한 속다짐도 솔직히 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듯 이어지는 부연 설명이 시시콜콜하지만 않았다면 강은 제 자랑질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을 것이다. 사족, 무한대로 치닫는 군더더기의 향연이여!
큰아들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가족들과 다산초당을 다녀온 뒤 정약용이 활약했던 조선 정조 치세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학교 제출용 과제물에 고스란히 구현해냄으로써 초등학생이라고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을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점(아비의 지도 편달이 지대했다는 행간을 읽어내는 게 주안점), 연애 시절 지금 아내에게 무엇으로 어필해야 할지 고민하던 끝에 뮤지컬로 대표되는 공연을 질릴 때까지 관람하자는 당근을 제시했다는 고백까지는 강답지 않게 로맨틱하게 들렸지만 느닷없이 데이비드 카퍼필드 마술쇼를 등장시켜 코앞에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걸 목격하는 초근접 관람이야말로 공연문화의 백미라는 둥 요즘도 아내를 위해 그 비싸다는 R석 관람만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나불대는 탓에 뮤지컬 오리지널 공연장 R석은커녕 영화관조차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인 부부라면 금슬에 심각한 균열이 생긴 게 분명하다는 방증으로 들리는 건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입술 가볍게 놀렸을 뿐인데 절세 고수만이 시전한다는 언중유골술로 청자로 하여금 자조, 자학을 넘어 부아가 뒤집히도록 화를 돋우는 경지, 도저히 그 끝이 보이질 않는 철딱서니란.
술자리 대화 고삐를 단단히 쥐곤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강을 가뜩이나 째진 두 눈이 더 째지도록 흘겨보던 곽. 그에게서 교활한 미소가 설핏 스치는 동시에 빈정거리는 말투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야, 니한테 바나나보트 타자꼬 꼬신 나는 웬수덩어리냐 생명의 은인이냐?"
지금 회사로 옮기기 전 그 대기업 계열 자동차 회사에서 강이 근무하던 때였다. 자동차 회사가 IMF로 문을 닫게 되자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종업원들이 부산 서면에서 파업에 돌입했다. 때는 바야흐로 바캉스 계절인 한여름. 휴가를 얻어 부산에 들른 곽은 뙤약볕 아래에서 생고생하는 강을 위로할 겸 해운대 해수욕장엘 데려갔다. 신난 강은 그길로 신상 슬리퍼까지 장만해 따라나섰고 그들은 바나나보트라는 당시로서는 첨단을 달리는 수상 레저를 즐기기로 했다. 다섯 명이 한 조인데 보트 선두에는 강이, 후미에는 곽이 자리를 잡고 그 사이에 어여쁜 아가씨 셋이 탑승했다. 해운대 바다를 신나게 휘젓고 났더니 '한 번 더!'가 절로 터져나왔고 그 멤버 그대로 모터보트 시동을 재촉했다. 그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강과 곽은 자리를 맞바꿨고 강은 자기 앞에 자리잡은 어여쁜 아가씨에게 걸쭉한 썩소를 날렸지만 무반응, 아무튼 여름 레저의 진정한 하이라이트인 바나나보트가 그 두 번째 질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껏 즐기고 돌아왔는데 보트 꽁지에 달려 있어야 할 강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뿔사, 보트가 한창 요동칠 때 나가떨어졌나 보다. 엔간해선 사람 기척쯤 들을 만도 한데 강 앞에 앉았던 아가씨는 제 뒤에 누가 타건 말건 애시당초 관심이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놀다가 당해도 조난은 조난이었다. 구명조끼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먼 바다로 떠밀려가지 말라는 보장도 없으니 안심할 수 없었다. 내 친구 찾아내라며 악을 바락바락 쓰는 곽. 사태가 심상찮았는지 바나나보트 주인이 해양경찰에 구조를 요청했고 제트스키 여러 대가 바나나보트가 지나다니던 일대를 수색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수색한 지 삼십 분쯤 흘렀을까, 거북이가 뒤집힌 형상으로 허우적대면서 살려 달라고 울먹이는 강을 마침내 발견했다. 그 후로 강이 한동안 바닷가 트라우마로 진저리를 쳤다는 후문. 흑역사를 떠올리게 해 얄미운 강을 한 방 먹인 곽.
얘기가 그쯤에서 끝났다면 강이 당시 겪었을 공포감을 동정하고 짖궂은 곽을 향해서는 통쾌와 비난이 뒤섞인 애증의 시선을 날렸을 테지만 강의 TMI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류장에 다 왔다는데 후달거려서 내릴 수가 있어야지. 허리 끊어질 것 같으니까 팔이나 제발 풀라고 해양경찰 아저씨가 애원하길래 설설 기어서 내렸지. 근데 슬리퍼 한 짝이 없는 거야. 그날 새로 산 신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