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센 미소의 낮은 버전

by 김대일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와 함께 들어온 엄마는 덥수룩해지도록 아이가 이발을 안 한다면서 잘 다듬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러면서 "혹시 SALT 아세요?" 묻는다. SALT는 깎새가 대학생 시절 거의 죽돌이다시피 했던 고등학교 동문 동아리다. 낌새가 심상찮아 깎새가,

"몇 기?"

"저는 아니고 아이 아빠가 SALT 21깁니다. 저는 일종의 명예 회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는 사람을 녹진하게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따뜻한 미소를 지닌 아이엄마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주차를 마친 아이아빠까지 합류하자 얘기는 더 무르익었다. 부부와 친하게 지낸다는 김 아무개는 남편보다 여섯 기 위 선배이면서 깎새보다는 두 기수 아래다. 그런 그가 SALT 밴드에 매일 글을 올리는 깎새가 별쭝났던지 부부와 대화하던 중 귀띔해줬던 모양이다. 그걸 들은 부부가 마침 깎새 점방 근처에 볼일이 있던 차에 겸사겸사 들렀고.

이런 일도 있었다. 굳이 안 깎아도 될 머리매무새인데도 이발의자에 턱 앉더니 참하게 다듬어 달라고 아주 공손하게 주문하는 손님은 생면부지였다. 그런데도 '당신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는 듯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손님은 깎새 손놀림에 제 머리를 맡기고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깎으나 마나 한 작업을 끝내자 손님은 머리를 감고 요금을 지불한 뒤 예의 공손한 태도로 끝인사까지 건네고 나갔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헌데 한 3~4분쯤 흘렀을까. 점방 문이 후다닥 열리더니 그 손님 다시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혹 돌아가다 말고 '내가 왜 저 깎새한테 비굴하게 굴었단 말인가'하는 억울함에 역정을 내려는 건가 싶어 일순 긴장 모드로 전환하는 깎새. 그러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자기가 더 억울해하려고 시동을 건다. 안 깎아도 되는데 굳이 깎아 달라고 한 사람은 손님이고 깎으나 마나 해도 나름 열심히 깎은 게 죄라면 죄일 뿐 다시 돌아와서 을러대면 기가 찰 노릇이라서 말이다. 그런데, 그 손님 히야시 빵빵하게 된 맥심 T.O.P 스위트아메리카노 캔을 건네더니,

"드릴 게 변변찮네요."

하는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느닷없는 호의로 무르춤해진 깎새는 입까지 얼어 버린 탓에 변변찮은 대꾸도 못 했다. 후다닥 건네고 쌩 자리를 뜬 손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근자에 벌어진 엉뚱하지만 화기애애한 장면에는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건 깎새에 관해 뭘 좀 안다는 듯이 슬쩍 내비치는 '미소'다. 상대를 향해 짓는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소, 실소, 폭소, 냉소, 고소, 조소 따위. 그 중 미소에는 자기 감정을 숨기려고 예의상 짓는 가짜 미소인 '팬암 미소'가 있는 반면 실제로 웃기거나 기뻐서 입과 눈까지 다 움직이는 진짜 미소 '뒤센 미소'도 있다. SALT 후배와 그 배우자, 깎으나 마나 한데도 굳이 깎으러 온 손님이 지어 보였던 미소는 단언컨대 '팬암 미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기뻐서 유감없이 드러내는 '뒤센 미소'도 아니었지만 백문百聞만 하다가 드디어 일견百聞한 반가움이 살짝 담긴 미소만은 틀림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뒤센 미소'의 낮은 버전쯤 될란가.

캔커피 건넨 손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SALT 후배와 그 배우자 이름 정도는 물어볼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만 기회를 놓쳤다. 그게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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