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새가 나온 대학교 ROTC총동문회라면서 연락이 온 적 있었다. 올해가 임관한 지 30년 되는 해인데 기념하려는 행사 관련해 부산 동기회장과 협의하려고 기별한 거라나. 상대방이 용건을 밝히자마자 일단 기함부터 한 깎새는 자신은 동기회장도 아니요 동문회 나갈 입장도 못 되니 이참에 아예 회원 명부에서 빼달라고 종용하다시피 부탁했다.
모르긴 몰라도 깎새 연락처 명부를 까면 ROTC로 엮인 지인들로만 삼분지 일에 육박할 게다. 그만큼 깎새 인생 역정에서 ROTC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 ROTC가 깎새 일상을 역행시킬 만큼 중대한 위치에 놓였냐면 그건 결코 아니다. 30주년 행사를 추진한다면서 관련 인원이 시도 때도 없이 모여 의기투합을 하고 행사 대비랍시고 적지 않은 회비를 거두는 게 그들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울지 모르겠으나 깎새는 몹시 부담스럽다. 중견 직장인 혹은 오너로 변모한 그들한테 각별한 기념일로 여겨질 그날에 요금 5천 원 하는 커트 손님을 받아내느라 애면글면하는 깎새로서는 치열한 일상의 연속이다. 호주머니에서 스스럼없이 나오는 돈이 그들 사재私財에서 표도 잘 안 나는 찬조금일지 모르겠으나 깎새한테는 피눈물 흘리며 떼어내야 할 제 살이다. 고로 노는 물이 다른 깎새 쪽에서 먼저 그들과 절연하는 게 서로 위하고 도와주는 셈이다.
시간 없고 돈 없다는 핑계는 표면적이고 실제 이유는 딴 데 있다. 나이가 드니 현상 유지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 변화무쌍은 당연하다. 허나 그 변화무쌍도 세월이 흐를수록 모난 데는 깎여 둥글둥글해지는 법이다. 원만해진 모습으로 주욱 이어지는 것, 특별히 나댈 것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어우렁더우렁하면 그게 현상 유지다. 한때 그 사람이, 그 조직이, 그 사건이, 그 시점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또한 하나의 추상追想으로만 남을 뿐 더 이상의 의미는 희석된다. ROTC라는 오래된 명예를 추상追想을 추상抽象으로써 관조하면 되는 것이지 더 큰 의미 부여는 곤란하다. 깎새한테 ROTC는 거기까지다. 하여 ROTC로 엮여진 관계망이 3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면 이어진 채로 굴러가게 놔둘 작정이다. 구태여 별쭝난 이벤트로 꾸민다거나 부풀린다고 전보다 더 이상적이겠는가라는 지독한 회의감, 30주년 기념 행사라는 허튼짓에 기함을 한 이유겠다.
1995년 3월 2일 소위로 임관해 그해 7월 1일 임지로 떠나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실질적인 소대장 역할이 이뤄진 걸 기념한다면 행사는 아마 7월 즈음 개최될 공산이 크다. 2025년 7월 1일 화요일, 깎새 점방은 마침 휴무일이다. 이전과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모친 면회하러 요양병원 들린 뒤 귀가해 막걸리 2통을 까 점심 겸 저녁을 즐기고 나서 이른 잠자리에 들 게 틀림없다. 그래야 다음날 지장없이 장사를 속개할 수 있으니까. 1995년 7월 1일이나 2025년 7월 1일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어제의 일상이 오늘의 일상이면서 내일의 일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