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가 기함할 소리겠지만 깎새는 여자란 존재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아름다운 여체에 눈 돌아가는 짐승 습성이야 여자란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했을 때부터 사그라든 적 없이 나이 먹을수록 오히려 더 맹렬해지는 회춘의 신기원을 이루기도 하거니와 레고 블럭이 딱 맞춰지듯 교감이라는 주파수가 통하는 여자라면 설령 그녀가 금성에서 왔다 할지라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
갑자기 옆길로 새는 신소리지만, 91학번인 깎새한테 1990년대는 다니던 대학교를 못 벗어나는 공간적 한계성을 지녔다. 졸업 후 ROTC 장교 입대가 중단없이 4년 내리 학업을 마치는 조건을 충족해야 했고 당연히 남들 다 하는 휴학은 언감생심이어서 대가리에 피가 얼추 마를 시점까지 대학교 교정을 떠나 본 적이 없었으니 거기서 벌어지는 인간사가 세상만사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 세상 여자를 규정지으매 거기서 보고 듣고 겪었던 경험적 영향력이 지대했음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신입생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었던 여자의 변심은 깎새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줬다. 이후로 깎새 연애사는 지금 한 이불 덮고 자는 마누라를 만나기 전까지 꼬일 때로 꼬였었다. 그럼에도 슬프도록 미운 그 여자가 지금은 미치도록 고마운 깎새다. 떠올리자니 열불부터 치솟는 흑역사가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쯤 품고 있기 마련이고 그게 치욕스럽다면 어떡해서든 떨쳐내려 안간힘을 쓰겠지만 잊겠다고 잊어지지 않는 게 사람 기억이다. 사람 뇌라는 게 그래서 참 요물인 것이다. 그럴 바에야 조목조목 기록으로 남겨 스스로를 경계하든가 남들한테 한바탕 재미를 안겨 줌으로써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게 나름 기발한 발상이겠다. 차제에 제하를 두고 연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고.
이름하야 <1990년대 여자를 더듬으며>. 여기서 '더듬다'는 성추행범의 더러운 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국어사전을 빌면 '어렴풋한 생각이나 기억을 마음으로 짐작하여 헤아리다'로 읽혀야 한다. 적확한 표현으로는 '회상하다', '상기하다'가 있겠으나 비슷한 뜻을 가진 예쁜 우리말을 내세우다 보니 그리 되얏다.
빌미는 인도네시아 사는 용이가 제공했다. 1990년대 입영썰을 풀어보랬더니 에피소드 두 개를 보내왔었다. 하나는 이전에 이미 게시했고 나머지 하나는 무슨 일인지 묵혀 뒀었다. 용이로선 웃긴 에피소드라고 해서 보냈겠지만 그걸 읽으면서 1990년대 캠퍼스를 활보하는 여자들이 눈앞에 불현듯 어른거렸다. 우연히 소환된 그 시절 여자들을 이대로 그냥 소비하기가 너무 아쉬워 그 여자들에 관한 사연들을 수소문해 엮어 보려 작정한 것이다.
일단 시동부터 걸긴 했는데 초장부터 밑천이 달리는 게 사실이다. 당분간은 깎새가 쓴 글이나 기억에서 뽑아내 재조명하겠지만 곳간이 바닥나면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한테 글감을 구걸할 수밖에 없다. 아쉬운 김에 인도네시아 사는 용이부터 닦달해야겠지만.
용이가 보낸 에피소드로 개시를 알릴까 한다. 불과 30여년 전인데 그 시절 여자는 그야말로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1) 손목 주고 입술 주면 다 준 건데
1992년 4월 5일 저녁, 남자는 애인과 친구들이랑 다음날 입영을 아쉬워하며 이별주를 기울였다. 어느덧 자리가 파하자 입영열차가 기다리는 부산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친구들과는 작별했고 남자와 애인만 남았다. 그 둘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애인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기다리실 텐데 얼른 귀가하라면서 혼자 가도 된다고 여자가 말렸지만 데려다 주겠노라 남자는 부득부득 우겼다.
그들은 그때까지 손만 잡아 본 애송이 커플이었다. 학번은 같은 91학번이었고 새내기 때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본격적으로 사귄 지는 해를 넘긴 1992년 봄 신학기 들면서부터였다.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은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아무도 안 보는 늦은 밤 손만 잡고 걷는 정도로밖에는 진척이 더뎠다. 하지만 이제 겨우 얼굴 보면 심장이 콩닥거리고 볼 빨개지다 가슴은 뭉클해지며 기분이 좋아지려는데 글쎄 남자가 군대를 간단다. 그것도 내일 당장.
남자는 남자대로 속이 문드러졌다. 이대로 입영열차를 탔다간 애써 불타오르던 연정은 가뭇없이 사그라들 테고 변심한다손 딱히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떠나기 전 오늘밤 이 여자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무슨 수를 써야겠다는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했던 게다.
애인집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남자가 갑자기 애인을 향해 휙 돌아서서는 단말마적 비명이나 다름없이 외쳤다.
- 내일 군대가는데 우리 키스나 한번 하자!
그렇지만 둘 다 그때까지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애송이들인지라 어떻게 하는 게 키스인지도 모르면서 입술부터 달려들다 보니 정통으로 이빨과 이빨이 부딪혔고 남자는 급기야 앞니 끝부분이 부러지고 말았다.
술이 취한 와중에도 고통이 엄청나 이빨을 부여잡고 주저앉고 말았는데 옆에서 흐느끼던 여자도 따라서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 흑흑! 여자가 손목 주고 입술 주면 다 준건데.
입영 전날 남길 각인이고 나발이고 부러진 이빨에 눈물이 핑 도는데 남자는 애인 달래느라 생고생을 했더란다.
* 이 남녀 이후에 어찌 됐을까? 인도네시아 사는 용이가 더 이상 밝히지 않아 잘 모르겠다. 대신 그들과 엇비슷한 커플이 떠오르긴 한다. 백일휴가, 일병휴가까지는 캠퍼스에서 손 잡고 걸어다니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이후로는 뜨뜻미지근하다가 남자가 복학한 뒤로는 혼자 다녔다. 물론 여자는 졸업한 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