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여자를 더듬으며>
2)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1993년, ROTC 1년차이자 3학년인 남자는 그해 같은 과 신입생으로 들어온 삼수생 여자후배와 허물없이 지냈다. 여기서 허물없이란 서로 말을 놓는 파격적인 사이를 의미한다. 어떤 코드가 그리 잘 맞아떨어졌는지는 남자한테 들은 바가 없지만 아무튼 여자동기들한테 족보 꼬이는 짓만 골라서 한다는 힐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삼수생 여자후배랑 친하게 지냈다.
그해 가을 여자후배가 남자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줬다. 같은 단과대 다른 학과 2학년이었다. 여자후배가 남자를 주욱 관찰한 바 ROTC 제복이 잘 어울리는 멀쩡한 허우대에 사교성 또한 부족함이 없는데도 만나는 여자라고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인 학과 여자동기 아니면 과방에서 자신처럼 여자후배랑 낄낄거리는 게 다니 한심해 보였다. 하여 여자후배는 다 큰 사내 한 놈 살리는 셈 치고 어울리는 여자를 물색하다가 에어로빅 동아리 회원인, 학번은 한 해 위지만 나이로는 한 살 아래인 그 여자를 점찍어 소개시켜 줬던 것이다.
에어로빅으로 다져진 몸매라 육감적인 데다 우선 싹싹한 게 여자도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 만나서부터 호감을 드러냈다. 몇 번 더 만나 차 마시고 단둘이 술까지 거리낌없이 마시니 사이가 급격하게 가까워져서 자연스럽게 여자집까지 바래다 주게 되었다. 여자 집은 당시 갓 조성된 신시가지 아파트였고 입주가 덜 되었는지 인적이 드물었다. 내부 시설이 아직 구비 중이라 엘리베이터에 CCTV가 안 달렸다는 여자 귀띔에 주저없이 도둑키스를 나누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남녀가 엉겨붙었는데 딥키스만 나눴을까. 서로 상대의 입술을 탐하는 동시에 여자의 가슴을 향해 남자의 양손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매번 흐뭇하게 지켜보던 육감적인 여자 몸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웃옷을 비집고 속살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중, 이상한 징후에 흠칫 놀라는 남자.
글래머러스한 여자 가슴이 손에 닿으면 당연히 물컹물컹하든지 탱탱하든지 부드럽든지 탄력적이어야 하건만 꼭 바람 빠진 풍선을 만지듯 허무함이 밀려왔다. 대신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스폰지 같은 이질감이 남자의 신경계를 관통하자 퍼뜩 떠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아, 말로만 듣던 '뽕브라'가 이거였구나! 급실망한 남자라도 매너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는지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자 애무하던 입술을 떼고(양손은 그전에 이미 거둔 상태로) 여자가 현관문 벨을 누르는 걸 끝까지 보면서 한 손은 아쉬운 듯 흔들어 보이고 다른 한 손은 닫힘 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아마 여자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남자의 변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게다.
그날 이후 여자 레이더에서 남자가 사라졌다. 1990년대 초반은 요즘과는 달리 삐삐의 전성시대였다. 저쪽에서 삐삐 호출을 해도 답이 없으면(전문용어로 '생까면') 이쪽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학과는 달라도 같은 단과대다 보니 전공 강의 듣는 건물은 같은 건물이라 어찌어찌 하다보면 마주칠 법도 했지만 남자 요령껏 잘도 피해 다녔다.
헌데 엘리베이터 사단이 일어나고 한 달쯤 지날 무렵부터 남자에 대한 이상한 추문이 퍼졌다. 남자가 다른 학과 여학생을 농락한 끝에 씹다 만 껌 취급을 했다는 게 골자였다. 소개해 준 여자후배가 진위를 확인하려고 도끼눈을 뜨고 남자를 수배했다. 남자는 일단 아니라고 부인하며 억울해했다. 남녀 사이에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잠수라는 걸 탈 수 있지 않는가, 그걸로 농락이니 씹다 만 껌이라는 자극적인 언사를 동원하는 건 묵과할 수 없다고 항변한 남자. 그렇다고 변심한 속사정이 뽕브라 때문이라고 여자후배한테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횡설수설로 얼버무리긴 했지만 이러다간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 말종으로 낙인이 찍혀 매장당하겠다는 위기감에 심각해진 남자가 여자를 찾아가 왜 그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냐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한 천 년 한을 품은 듯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말없이 한참을 노려만 보길래 그 서슬에 기겁한 남자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영부영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남녀 관계는 결국 그해 겨울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간 쌓인 오해를 깨끗하게 씻자며 여자가 먼저 제안을 했고 남자 역시 흔쾌히 받아들여 학교 옆 커피숍에서 마지막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ROTC 단복을 정갈하게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커피숍에 입장한 남자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앉긴 앉았는데 그 순간, 철썩!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번쩍!하는 번개불 같은 섬광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싸대기 한 대로 그동안 쌓인 체증을 속시원하게 해치웠다고 여긴 여자가 그길로 자리를 떴다. 어리삥삥한 것보다 창피함이 우르르 몰려온 남자가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선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이 흩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쥐구멍 찾는 심정으로 분위기를 살피던 남자였지만 아뿔싸, 가여워하는 듯하면서도 어처구니없어 하는 냉소가 완연한 ROTC 2년차 선배를 발견하고 말았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기립해 '충성!' 구호를 날려야겠지만 복잡미묘한 심정이던 남자는 그마저 때를 놓쳤다. 선배가 다가와 위로하듯 남자 어깨에 손을 걸쳤다. 뭐라고 쫑알쫑알 읊어대는 성싶었는데 하나도 안 들렸다. 단, 이 말만 빼고.
- 사는 게 다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