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입니다

by 김대일

<1990년대 여자를 더듬으며>


3)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입니다

1994년, 여자동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던 4학년 남자. 하지만 전해인 3학년 졸업여행 일원으로 어울리면서 너나들이하는 사이로 발전했지만 1년이 넘도록 다음 진도가 전혀 안 나가는 게 문제라면 큰 문제였다. 싫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그저 남자동기 여럿 중 한 사내 정도로만 여기는 여자동기 본새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사귀는 거 어때?'라고 대쉬할 배짱이 남자는 또 없었다. 일종의 학습효과라고 해두자. 두 해 가까이 사귀던 여자가 뒤통수 사정없이 후려치고 잠수한 뒤로는 여자를 대하는 남자 태도가 여간 조심스러워진 게 아니었으니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관계가 2학기까지 이어지면서 지쳐 버린 남자한테 소개팅 주선이 들어왔다. 그 학교 2학년 여자였다. 여자동기한테 어깃장 부리는 심정으로 소개팅 자리에 나간 남자는 소개팅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버렸다. 청순한데 귀여우면 숫제 불감당인데다 은쟁방에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 옆에 위트까지 데코레이션으로 받쳐 주니 비교 불가인 4학년 여자동기는 더이상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한두 번 더 만나자 소개팅녀가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생일 선물으 준비해 이벤트를 벌이려고 했다. 생일 당일, 당사자는 오지 않고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가 난데없이 나타나 소개팅녀 대신 이별을 통보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제3자한테서 강제 이별을 통보받자 꼭지가 돌 대로 돈 남자는 애꿎은 친구 멱살을 틀어쥐고 까닭을 추궁했다. 친구가 이실직고한 바 양다리였다는 게다. 원래 사귀던 남자와 살짝 틀어지는 바람에 홧김에 소개팅 자리에 나왔는데 예상치도 않게 남자가 자기한테 눈이 돌아갔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얼마 뒤 둘 사이 화해를 해 관계가 원상복귀되고 나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눈 돌아간 소개팅 남자한테 솔직하게 불자니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라 걱정부터 앞섰단다. 하여 소개팅 주선한 선배한테 대신 정리 좀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

가슴에 대못이 박혔는데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어리벙벙 무감해졌다. 한편으로 졸업이 코앞인데 바람을 맞아도 더럽게 맞았다는 사실이 돌기라도 하면 망신살 뻗치기 십상이라 혼자 속앓이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여자동기가 떠올랐다. 애시당초 소개팅이란 것도 여자동기를 도발하기 위한 수작질로 다분했다. 남자가 소개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면 돌부처가 아닌 이상 감정이 꿈틀댈 게 분명할 테니 그걸 노려볼 만했다.

졸업반인 여자동기는 학기 중에 취업을 성공해서 OJT(직장 내 교육훈련On-the-Job Training)를 한창 받고 있었다. 하루는 지도교수 면담 약속으로 학교를 찾은 여자동기와 남자가 마주쳤다. 거기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학교를 같이 다녔던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수줍은 표정을 지어본 적 없었던 여자동기가 뱀이 똬리 틀 듯 온몸을 배배 꼬면서,

- 나, 사귀는 사람 생겼다. 회사 선밴데 그렇게 젠틀한 남자는 살면서 처음이야. 축하해 줄 거지?

이후로 노래방만 갔다 하면 남자가 불러제끼던 노래가 있었다. 이동원이 부른 <또 기다리는 편지>다. 그 노래 가사가 정호승이란 시인이 지은 시인 모양인데 청승맞기 이를 데 없는 그 노래에 왜 꽂혔는지 남자한테 안 물어봐서 모른다. 다만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합니다'란 대목에서 남자가 대성통곡하는 꼴불견을 자주 목격했다는 후문만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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