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 내딛기가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게다. 같은 학교 ROTC 출신 동기와 선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이른바 크라우드펀드 덕에 5년 전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요행히 내긴 했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지 그들에게 또 손 내미는 건 사람 할 짓이 아니다. 하여 흑역사나 다름없는 처녀작 말고 처음 같은 두 번째 책만은 꼭 내돈내산으로 내놓겠다고 마음 굳게 먹은 것까진 가상하지만, 그러니 자연스레 요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저자랍시고 서울까지 가서 출판사 관계자를 만났을 때 책을 내는 데 적정가라는 게 존재하고 에누리 없는 장사가 이 세상에 어딨냐고 앓는 소리를 해도 최소 기백만 원은 깔아야 제 이름자 박힌 책 표지를 겨우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은 아무나 내는 게 아니고 호주머니 사정 좋은 호사가들이나 즐기는 여가 선용임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내돈내산으로 내놓을 처음 같은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리겠구나(혹은 변죽만 울리다 말겠구나)며 기약없는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일전에도 언급했듯 깎새 네이버 메모장엔 1,500개에 육박하는 조각글이 쌓여 있다. 조각글일지언정 한 꼭지 당 A4 용지 1매만 쳐도 1,500매 분량이다. 물론 글 나부랭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글이 아니며 책으로 고대로 옮겨질 만한 값어치가 있느냐고 따지고 들면 기죽을 수밖에 없다. 글쓴이 깜냥이 변변찮으면 1,500매가 한낱 쓰잘데기없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라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제법 많은 실탄을 쟁여 놓은 건 사실이다. 하여 총알 없어 못 싸우겠다는 핑계는 안 통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 셈이다.
같은 과 동기이면서 문학평론가 겸 국어선생인 P가 며칠 전 깎새가 게시한 글을 읽고 연락이 왔었다.
- 거기에 등장하는 여자동기가 누구?
- 뭣이 중한디?
학부생 시절로부터 깎새한테 큰 절망감을 안겨 줬음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글을 쓰라고 종용하는 P. 아닌 깜냥인 줄 알면서도 쉽사리 손을 못 놓는 데는 버거울 만하면 어김없이 등장해 깎새를 자극하고 동기부여하는 P 지분도 상당하다. 그런 그가 깎새가 반길 만한 정보를 내놓았다.
- 써놓았던 거 추려서 책을 내 보시게.
- 한두 푼 드는 게 아니니 언감생심일세.
- e북이라고 들어봤남? 전자책 말일세. 그거 돈 안 드네. 나도 만들어 봤거덩.
듣던 중 반가운 호재가 아닌가! 당장 만날 약속을 정했다. 다음주 월요일 해운대구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미련곰탱이 김 주사와 셋이서 모처럼 회포를 푼다. 그 자리에서 돈 안 들이고 책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는다면 때때모찌 깎새라도 그날 저녁 한 끼 대접할 용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