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럴리스트를 자임했던 고종석은 그의 저서 『국어의 풍경들』(문학과지성사, 1999)에서 한국어를 국어라고 부르는 관행에는 자존自尊의 동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어라는 이름에서는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고쿠가쿠: 일본 고전 문헌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선양하려던 17세기 이래 학풍)의 메아리가 울린다고도 했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자들(고쿠가쿠샤)이 중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을 자기들 학문의 심리적 밑받침으로 삼았듯, 한국의 국학자들도 외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에 자기들 학문을 다져 왔기에 '국학', '국어,' 국사', 국문'이란 표현은 곧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념적 표현이라면서 말이다. 고종석으로서는 국어라는 말에 담긴 자기 중심주의, 주관주의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 알맞지 않다고 여겨서 개인적으로는 국어라는 말보다 한국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깎새가 제 발로 들어갔을 때는 그 학과가 한국문학만을 가르치는 줄 착각해서였다. 막상 입학하고 났더니 반듯한 졸업장을 받자면 전공필수 과목 절반인 국어학을 이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망연자실해하고 말았다. 시험 대비 차원에서 훈민정음 서문이야 노래 부르듯 줄줄 읊어댔었지만 칠판에 그려 놓은 사람 발음기관을 보면서 '연구개음, 경구개음, 치조음, 순음, 후음' 따위를 외우자니 차라리 인체 해부도를 외우고 말지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던 고등학교 국어 문법 시간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던 게다. 그 악몽은 현실이 되어 4년 내내 이어졌다. 학과 이름에 '국어'가 붙은 진의를 알아챘다면 결코 지원하지 않았다는 후회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심정 그 자체였어서 당연한 귀결이겠지마는 마지못해 임하는 수업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낙제를 겨우 면한 학점을 받아들지언정 남들 다 하는 재수강은 꿈도 안 꿨으니까. 그렇게 졸업한 과가 '국어'가 빠진 '국문학과'로만 기억되길 바랐었다.
헌데 나이를 먹어가매 이로운 면이 아주 없지 않은 게 사람이 전보다 유연해진다는 점이다. 난감하고 거북했던 기억들로 점철된 고정관념을 무르게 만드는 정서적 여유는 퍽 긍정적이다. 학창시절 때는 언감생심이던 국어학을 대하는 요즘 태세가 그 증좌다. 언제부터인지 꼬집어 말하진 못하는 언제부터인가 은은하게 스며드는 우리말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벅찬 행복이자 행운이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거나 다 안다고 착각해 알려고 하지 않던 우리말이 주는 언어적 우수성에 까무러칠 만큼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것을 구현해 낸 한글(노마 히데키 표현을 빌자면, '논리적인 지知이자 완전히 새로운 미를 창조하는 게슈탈트(형태)의 변혁')도 결코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한글날에 즈음해 『한글의 탄생』(노마 히데키 지음/김진아, 김기연, 박수진 옮김, 돌베개, 2011)을 다시 집어들었다. 나온 지 십 년을 훌쩍 넘긴 책은 볼수록 흥미롭다. 원래 한국어와 한글을 거의 모르는 일본어 독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라고 하는데 한글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에서부터 언어와 문자에 관한 전제까지 차근차근 풀어나가 한국인 저자보다 더 우리말과 한글에 정통한 성싶다. 명민한 일본 언어학자 덕분에 전보다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바라보게 되어 고맙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깎새가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는 정체성을 새삼 일깨워줘 그 또한 감읍할 따름일지니.
<학이 운다>라는 것은 한자한문이 어떻게든 쓸 수 있다. 본래 새라는 대상을 본뜬 <상형>이야말로 한자의 발생론적인 근거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한자한문이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이 운다>라는 '모습'이었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들려오는 한국어의 <학의 소리>가 아니다. 찰나를 슬피 우는, 혹은 천년을 서글피 우는 그 <소리> 자체를 그려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음 그 자체를 형상화形象化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를 <형태>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만 한다. <모어>를 <형태>로 만들어야만 한다.
<용음합자 用音合字>라는, 음으로써 글자를 합치는 시스템이야말로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이었다.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쓴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로, 한자를 빌린 표기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일상 언어 구석구석에서 숨 쉬는 오노마토페를 <쓰는> 순간이란 『훈민정음』의 머리말인 세종 어제御製 서문에서 말한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힘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진정한 <나ㆍ랏:말씀=조선어>를 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노마토페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해진 언어>를 표기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두 번째로, 언어음을 초성ㆍ중성ㆍ종성, 그리고 악센트라는 사분법에 의해 분석 종합하는 <용음합자>라는 시스템이야말로 의성의태어의 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내는, 압도적인 우위를 보여줄 수가 있다. <소리>의 모든 것을 <형태>로 만들 수 있다는 우위. 고유어의 모든 것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우위.(『한글의 탄생』, 252~253쪽에서)
* 오노마토페onomatopee는 의성의태어를 뜻한다. 우리말처럼 의성의태어가 차고 넘치는 말도 없다. 그 말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낸 게 한글이다.
비뚤비뚤, 배뚤배뚤, 삐뚤삐뚤, 빼뚤빼뚤, 왜뚤비뚤, 왜틀비틀, 왜뚤왜뚤,비틀비틀, 배틀배틀, 삐틀삐틀,빼틀빼틀, 비실비실, 배슬배슬(배실배실), 비칠비칠, 배칠배칠, 비슬비슬, 비쓸비쓸, 비치적비치적, 비트적비트적, 빼트작빼트작, 삐트적삐트적, 배치작배치작, 배트작배트작, 배착배착
우리말 의성의태어를 보고 있노라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경이롭기 그지없다. 파생의 미학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