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이 임종 때에는 곧잘 의식儀式같은 것을 행하여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만일 신식을 자처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게 하라. 나도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루쉰의 유언에 덧붙인 첨언으로 참으로 압권이다. 나와 우리를 터무니없이 고통스럽게 괴롭혔는데 관용으로 용서하는 게 과연 합당한 짓인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받은 대로 대갚음하는 게 사람답지 못하다고 비난받을 일인지, 응당한 복수만이 재발의 싹을 잘라 버리는 깔끔하면서도 원천적인 응징이라는 점을 왜 거북해해야 하는지.
물론 시대 상황에 입각해 루쉰의 유언을 디다볼 필요는 있다. 전쟁의 시대라는 거친 시대와 무고한 죽음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하는 투사적 관점. 하지만 비록 전쟁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면수심의 파렴치한들이 뻔뻔하게 판을 치는 현재가 총알이 빗발치지 않았을 뿐 전창터에 다름없다면 루쉰의 유언은 여전히 유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을 두어번 소리내어 읽다보면, 이 짧은 문장이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구나, 홀로 소리내어 말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구나,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은 용서하지 말아야지. 용서받을 수 없는 자는 끝까지 용서하지 말아야 하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일들 때문에, 어쩌면, 내가, 어쩌면 누군가가 깊이 병들고 아팠겠구나.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에 용서를 종용받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용서가 되어 있고, 용서한 일이 없는데도 어느새 용서가 되어 있는, 그런 세상을 내가, 누군가가 살았겠구나. 우리 모두가 살았겠구나.(김인숙 소설가, 경향신문, 2016.12.28 에서)
2024년 12월 3일 내란을 저지른 죄인들을 단죄할 시점이 점점 다가온다. 관용보다 복수를, 단호한 응징만이 잠시 이탈한 역사의 궤도를 되돌릴 수 있다. 타인을 괴롭힌 자는 결코 용서치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