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형태의 권위나 억압과 그에 의한 통제가 없이 자유롭고, 다수가 소수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법과 처벌 대신 개인 내면의 도덕과 양심에 의해 실현되는 올곧은 질서가 바로 선 정의로운 세상, 우두머리가 없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아나키즘. 아이들은 학교 다닐 필요가 없고 국가가 해 준 게 없으니 국민연금 따위는 못 낸다는 괴팍한 아나키스트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오쿠다 히데오가 쓴 일본 소설 『남쪽으로 튀어!』(양윤옥 옮김, 은행나무, 2006)에 관한 어떤 블로거의 서평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부 대목을 끌어오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의 국가-자본-노동의 3자 구도를 그려내고 있어 흥미를 준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노동세력이 쇠퇴하며 전 사회의 순응주의가 가속화된 일본사회에서 과거 과격파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인물의 현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가장 큰 포인트이다. 작중 화자인 우에하라 지로는 70년대의 일본을 모르는 어린 남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상의 주인공인 지로의 아버지 이치로(책에 따르면 6~70년대 전공투 시절 '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의 행동대장)는 국가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부조리를 의심하고 기성질서를 전복하는 불편한 존재이다. 심지어 "국민연금을 내야 한다면 국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세금을 비롯한 일체의 부담금 납부를 거부하는 등 아나키즘적인 정치성향을 공공연히 내비치는가 하면 그 어떤 생산활동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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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담론을 접할 때마다 "난센스"를 외친다. 그가 그렇게 외칠 때마다 난감해지는 가족들도 고개를 좌우로 젓지만, 지로는 아버지의 비순응주의적인 태도를 매개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센스라는 용어로 상징되는 정상성은 누가 정해 놓은 것이며, 그 정상성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가 하는 물음을 이 책을 통해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센스의 구현물인 국가는 어떠한 존재인가? 주인공 지로는 소꿉친구가 상급생의 폭력에 휘둘리는 걸 보며 국가, 법, 질서에 대해 생각한다. 한 친구는 지로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막기 위해 법이 존재한다며 일본은 법치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일군 지로의 집이 철거되는 장면에 이르면 국가와 법은 자본의 편이며, 강한 자를 위한 폭력의 도구로 묘사된다.(판단중지 블로그, <해학에 담은 반순응주의-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네이버, 2018.03.22 에서)
현직 대법관은 행정법원 재판장이었던 2011년 당시 버스비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버스기사를 해고한 버스 회사 측 결정이 '정당한 판단'이었다고 판결했다.
콜버그가 <하인즈의 딜레마> 질문을 하면서 제시한 도덕 발달 단계 이론은 세 가지 도덕 발달 수준과 수준 당 두 가지 하위 단계로 이뤄져 있다. 가장 낮은 도덕성 발달 단계인 전 인습적 수준Pre-conventional level은 ①처벌과 복종 지향, ②자신 또는 타인의 욕구 충족 단계로 구성되고, 전 인습적 수준을 넘어 대다수 사람들이 속한다는 인습적 수준Conventional level은 ③대인관계와 평판 중시, ④법과 질서 중시 단계로 구성되며, 인습적 수준을 넘어서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탈 인습적 수준Post-conventional level은 ⑤사회적 계약과 합리성, ⑥보편적 윤리와 양심 중시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속하는 인습적 수준 중 ④법과 질서 중시 단계는, 모든 잘잘못은 법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고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의 준수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빗대어 해석한다면 하인즈의 행동은 부당하다.
하지만 내가 하인즈가, 800원 횡령한 버스기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내가 만약 하인즈라면, 내가 만약 800원을 횡령한 버스 기사라면 이른바 공정한 법 적용에 의해 내 도덕적 기준을 합리적으로 판단받았다고 받았노라고 수긍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한다.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는 법을 무시하고 내친 김에 국민으로서 져야 할 모든 규범을 훌훌 털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만천하에 아나키스트임을 밝힌 뒤 남쪽으로 튀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발달 단계의 정점이 아닌지도 심각하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