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안정용 볼거리

by 김대일

친구 용이가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기 전 부산에 살 때였다. 하루는 술 마시자고 달려와서는 최근에 보고 완전히 꽂혔다는 영화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홍어 대신 문어 삼합을 안주로 시켜 놓고 군침 삼키는 술상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연신 나부대던 용이가 낯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말은 청산유수인데 그 달변 안에다가 제 감정 속살은 꽁꽁 감쳐 놓아 당최 그 심중을 헤아릴 길 없는 평상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녀석 표현을 고대로 옮기자면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녀석은 분명 센세이셔널했다.

달변에다 거리낌없는 행동거지가 역동적이기까지 해서 깨고 부수고 유혈이 낭자하는 스펙터클 액션 무비를 즐길 법한데 어울리지 않게 담백하고 소소한 영화에 꽂혀 격무에 시달리는 심신을 달랜다고 씨부렁거리길래 '설마 니가?'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겠더니만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그 증거물로 꺼내놓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슬슬 혹해졌다. 보고 보고 또 보다 완전히 영화에 매료된 녀석이 야밤에 불쑥 영화 촬영지였다는 경북 군위로 차를 몰아 한달음에 달려갔다는 후일담은 돈키호테 같은 녀석의 엉뚱함을 극단으로 부각시키는 동시에 '도대체 무엇이'라는 의문이 본격적으로 들었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용이 녀석 심적 갈등이 무척 심했던 듯싶었다. 회사 중역으로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치받는 상황에 처하자 낙천주의자를 자처했음에도 그 갈등적 상황을 타개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막중한 책임감 빼면 시체인 용이가 직면한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 회피를 선택했을 리 만무했지만 갈등의 중심에 선 자로 겪었을 외로움이랄지 괴로움을 견딜 자기만의 자구책을 염원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으리라. 그 와중에 눈에 쏙 들어온 노스탤지어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인지라 일고의 망설임없이 이루어진 야밤 군위행은 그 욕망의 구현이었음이 분명했으리라.

갈등은 누구나 다 있고 조정될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 깎새도 매일매일 갈등에 처한다. 손님과 갈등, 마누라와 갈등, 심지어 표는 안 내지만 심리적 동요가 이만저만이 아닌 딸아이들과 겪는 갈등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차라리 매를 맞는 심정으로다가 맞서면 그만일 테지만 드러내지 않으면 모르는 갈등은 속앓이가 되어 마음에 생채기로 남을 우려가 짙다.

지금까지 거짓말이 과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깎새 나부랭이가 강단 센 용이조차 쉽지 않았던 갈등 조정 능력을 갖췄을 리 만무하다. 소극적이다 못해 박약한 대처력은 상황을 타개하기보다는 회피하기에 급급할 뿐임을 고백한다. 나이를 헛먹은 택이지만 회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니 다른 꼼수를 찾을밖에.

용이처럼 영화를 보면 어떨까. 너 죽고 나 죽자 식 갈등 해결에 초점을 맞춘 심각하고 속시끄러운 영화 말고 용이가 극찬했던 <리틀 포레스트>류 타격감 제로인 갈등만 난무한 심신안정용 볼거리만 찾아서 보면 어떨까 싶다.

엊그제 자다 말고 메모지를 찾았다. 문득 떠오른 영화 목록을 미친 놈처럼 마구 휘갈겼던 것이다.



<즐거운 인생>(2007)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2023)

작가의 이전글"먹고 떨어지세요!" 글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