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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27)

by 김대일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

이준관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햇빛과 바람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턱수염을 밀어주는

이발사가 되고 싶다


비록 내 가위질은 서툴겠지만,

나귀처럼 가위는

스프링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의 삶을 위로해 주는 말을

속삭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에서

처음 읽었던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허름한 액자에 걸려 있던 시


삶은 끝내 가난한 그들을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세평 좁은 이발소에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수증기 뽀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처럼 하얀 성탄절의 눈을

기다리겠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의 머리를

성탄목聖誕木처럼

아름답게 깎고 다듬어 주겠다​

(성탄 시즌이고 해서 고른 시다. 프랑스말 중에 '클리셰'라고 있다. 미리 만들어 놓은 기성품처럼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 바꾸면 '틀에 박혔다'쯤 된다.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는 많다. 크리스마스라 모든 걸 용서해야겠는데 크리스마스라 으레 딸려 오는 그것들은 식상해 귀찮다. 근데, 주전자에 물이 끓어 수증기 뽀얀 이발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이발사와 크리스마스는 어째 신선하다. 이발사인 내가 말해 속이 좀 보이긴 하지만 이 조합 은근 잘 어울린다. 푸슈킨, 난로, 주전자, 성탄목 따위는 이질적인 두 제재를 끈끈하게 엮어주는 효과를 내는 것 같다. '앙상블'은 전체적인 어울림을 뜻하는 프랑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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