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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自由​, 자기自己의 이유理由

by 김대일

몇 해 전 아무개 협동조합이 후원하는 행사에 봉사갔던 적이 있었다. 부산의 유명한 공원 안에 위치한 사찰은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과 그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할 장비가 완비된 취사장을 부속건물로 보유하고 있어서 무료급식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후원하는 단체 수가 많아서인지 급식은 상시적으로 행해지는 듯했는데 그날은 협동조합이 일 년의 한 번 한 끼 식사를 책임지는 날이었다. 여러 단체가 돌아가면서 식사를 제공하지만 행사 전반을 아우르는 주체가 장소를 제공한 사찰이라는 건 사찰 주지라는 자가 음식 준비로 분주한 취사장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식당 주변에 모인 노숙자들한테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 꼴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메뉴는 소고기국밥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넉넉하게 음식을 장만해 능숙하게 배식을 했다. 국밥을 다 먹은 사람들 역시 능숙하게 잔반을 처리한 후 그릇을 반납했다. 늘 배가 주린 이들이라 나올 잔반이랄 게 별로 없었지만 그들 중에 제법 목소리 큰 한 사람이 잔반 소쿠리 옆에 버티고 서서 나오는 잔반 양을 일일이 확인했다. 기준량 이상이 배출되는 걸 단속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상한 장면이었다.

한번 배식받은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배식 줄에 몰래 다시 설 정도로 기갈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동가식서가숙에 풍찬노숙한 탓에 한눈에 봐도 운신이 편치 않아 보이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치아 상태가 엉망인 한 노숙자는 밥 한 톨 제대로 씹질 못하고 국물만 찔끔찔끔 떠먹더니 배식받은 국밥을 다 버렸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아주 모르는 안면이 아니니 오죽하면 다 못 먹고 버리겠냐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잔반을 체크하는 이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안절부절못했다. 한창 북적대는 와중에 사찰 주지인 작자가 불쑥 나타나 잔반 소쿠리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소쿠리를 뚫어지게 보더니 고개를 돌려 병색이 완연한 사람한테 호통을 벌컥 내질렀다. 주면 다 먹든지 못 먹겠으면 싸가던지 버리긴 왜 버리냐면서.

호통이 느닷없어 뜨악하더니만 금방 그만둘 것 같지 않을 지청구에서 불현듯 궁핍한 자들을 향한 경멸이 섞여 있음을 발견했을 때 해반주그레한 그 종교인의 면상에다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씹을 이빨은 없지만 고달프게라도 오물거리는 까닭이 어떡하든지 허기를 지우려는 안간힘이라는 걸 안다면 먹을 만큼 받아서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는 그 빌어먹을 발우공양의 원칙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우연히 참석한 행사에서 우연히 포착된 한 장면만으로 자선가들이 베푸는 선행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속담이 빌어먹는 처지일지언정 인간의 생래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엄연한 자유 의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주지란 자는 안 해도 될, 아니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배가 터지게 빌어먹든 걸식한 음식을 내다버리든 그건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다. 선심이 권력이 아니듯 잔반으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혹시 경멸조의 악다구니가 시혜자와 수혜자란 수직적 상하관계에서 기인한 건 아니었는지 미심쩍었다. 과연 그런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선행이란 가식에 가려진 천박한 계급성이랄밖에.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한 정치인의 최근 연설 중 한 대목이다. 그가 정작 말하려고 했던 의도는 선했을 게 분명하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지 않나. 하지만 이 대목만으로 나는 그 정치인이 그토록 떠받드는 자유의 진의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었고 무료급식 행사장에서 봤던 사찰 주지가 오버랩되기에 이르렀다.

가장 낮은 데까지 추락했다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을 '자부심',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갖는 게 ‘자유自由’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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