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푸짐하게 차려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바로 근처에 상설시장 있겠다, 맛난 반찬 잔뜩 냉장고에 재워뒀다가 성찬을 누려도 될 법하나 허두에서 밝혔듯 마음 뿐이다.
가게를 막 열 즈음 해운대보다 분명 싼 물가 덕에 시장통 반찬가게 들러 부담없이 입맛대로 고른 적이 있었다. 맛도 맛이거니와 특히 넉넉한 양이 마음에 쏙 들었었다. 한동안 반찬 걱정은 덜겠다며 냉장고에 보관을 했는데 며칠 못 가 쉬어 버리는 게 아닌가. 마누라 뇌피셜로는 과도한 MSG 투입의 병폐라나 뭐라나. 듣고 보니 일리가 아주 없진 않았다. 여하튼 자른 머리카락이 한짐이라 쓰레기 봉투값 대기에도 만만찮은 판국에 음식물쓰레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보다는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은 줄 알았는데 별수 없다는 실망감이 커서 시장통 발걸음을 아예 끊었다.
그때 산 갓김치는 그나마 쉬어도 먹을 만해서 여태 냉장고 한 구석을 차지하고 내 간택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걸로는 부실해 집에서 가져온 무우생채와 총각김치를 반찬 리스트로 추가했다. 김치뿐인 점심상에 어울리는 음식은 컵라면 국물에 만 밥이 와따다. 가게 한 귀퉁이에 냉장고, 전자레인지, 씽크대, 자그마한 탁자를 꾸역꾸역 집어넣은 조붓한 공간을 알량한 탕비실이라 부르기에도 창피하지만 어쨌든 거기서 한 끼를 때워야 하는 처지에서 개업 전 '점심만은 왕처럼 먹겠다'는 다짐은 금세 쉬어 버린 반찬처럼 부질없다.
숟가락 들 때가 점심 들 때지만 밥 먹는 시간을 피해서 머리 깎으러 오는 손님은 없다.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게 손님이다 보니 느긋하게 점심 한 끼를 즐길 시간이 되레 사치다. 컵라면 국물에 만 햇반 한 숟갈을 막 뜨려는데 손님 입장하면 '먹던 거 마저 먹을 때까지 신문이나 보면서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할 배짱이 없는 나는 입에서 굴러다니는 밥알을 씹지 않고 삼킨 뒤 튀어나가듯 얼른 손님한테로 가 커트보를 친다. 설령 군침 도는 맛난 음식을 장만했다 한들 딴 데 정신이 팔린 탓에 식도락 기분을 느낄 새가 없고 손님 응대하다 다 식어빠진 음식을 보면 달아난 입맛이 다시 돌아오기도 난망하다. 게 눈 감추듯 후다닥 한 끼 해치울 간편식을 점점 선호하게 되는 게 그러니 당연지사가 됐고 집에서 싸 온 밥에 김치, 참치 캔, 컵라면이 따라서 제일 만만하다. 치울 음식물쓰레기도 거의 없고. 이른 출근 늦은 퇴근 탓에 부실해진 끼니를 점심으로나마 보상받겠다는 계획은 애초부터 실현불가능한 공상일 뿐이었던 셈이다.
사활까지는 아니더라도 먹는 것에 진심인 나는 솔직히 이 대목에서 좀 고되다. 잘 먹어야 일 능률이 올라간다는 걸 잘 알지만 잘 먹을 여건이 못 된다는 딜레마가 스트레스로 쌓일 공산이 크다. 점심 끼니 적마다 식사를 방해하는 손님이나 많이 와주면 돈 버는 재미라도 느껴 그나마 스트레스를 조금은 상쇄시킬 테지만 요 며칠 간 점심 때가 너무 느긋해 슬쩍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