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신영복, 『강의』, 돌베개, 272~3쪽)
『노자老子』는 거의 운문이다. 5천여 자에 불과한 글은 매우 간결하면서 함축적이다. 이마저도 백낙천白樂天은 인위를 거부한 노자의 가르침이 아닐 테니 노자를 이해한다면 5천 자도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이 말을 나는 노군老君에게 들었노라/만약 노군이 지자知者라면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5천 자를 지었나.
속 생각을 당신에게 말하는 바는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가치를 판단하게 몰아가는 건 무리다. 내 말에 당신이 대꾸하지 않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노자老子』 56장)
생각의 시비는 내가 내리는 것도 당신이 내리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라 함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상대적이어서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니 굳이 내 생각을 당신에게 우겨서는 안 되고 당신은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까닭이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 아래 누구나 주체적인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니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따위 어리석은 짓은 느자구없기가 이를 데 없다. 구태여 집적거리지 않아도 나나 당신의 생각은 알아서 무르익을 테니 제발 그냥 놔두시라. 정 숟가락이라도 얹고 싶거들랑 꺾지도 비틀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 받아들이시라. 그래서 서로가 통하거들랑 공감하며 어울리자. 그것이 내가 바라는 무위를 추구하는 삶이다.
길 위의 철학자 故 장일순 선생은 사람을 닮은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분으로 그 중에 <몰라 몰라>라는 그림의 화제畵題가 참 익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