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위하여

by 김대일

요 며칠 글 잘 쓰는 술꾼 둘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작고한 언론인이자 칼럼리스트 심연섭의 「건배」(중앙m&b, 2006)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기자 출신 글쟁이 임범이 쓴 「술꾼의 품격」(씨네21북스, 2010)이다.
「건배」는 저자가 외국을 다니면서 맛본 술에 얽힌 사연과 소회를 담은 이른바 글로벌 술 문화답사기이고, 「술꾼의 품격」은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소재로 그 술에 관한 정보를 영화 이야기와 더불어 흥미롭게 풀어나간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술꾼의 품격」(201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함)에 등장하는, 요새는 일상용어가 된 '폭탄주'란 단어가 「건배」에서는 '버번 위스키가 든 조그만 잔을 안치해놓은 다음, 맥주를 서서히 따라 큰 글라스를 채우는'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는 미국식 제조법이 있다는 정도로만 소개할 뿐 전혀 보이지 않으니 두 책 간의 연식 차이를 짐작할 만하다.(「건배」는 심연섭이 작고한 1977년에 당시 효문출판사에서 저자의 재미있는 글들을 모아 출판한 「술 멋 맛」을 중앙m&b에서 2006년에 재출판) 30여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술이라는 관심사를 두고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공유한다. 특히 마티니란 칵테일에 관한 부분에서는 두 책 공히 허풍선이들의 아무말 대잔치를 연상케 해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마티니는 증류주인 진에다 베르무트(와인에 알코올과 허브를 첨가해 만든 리큐르)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이다. 아마추어들의 마티니가 진과 베르무트 비율을 통상 3대 1 정도로 한다면 프로의 경지에 접근할수록 5대 1, 10대 1, 100대 1로 변한다나. '엑스트라 드라이'라고 하면 100대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드라이dry란 담백하다, 즉 달지 않다는 의미라고 하며 전통적 마티니 애호가들은 그 드라이 마티니를 흔들지 않고, 저어야stirred, not shaken 한다고 주장한단다.(그런 마티니 관습을 뒤집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숀 코너리가 1대 제임스 본드로 나온 영화 <007 닥터 노>에서 제임스 본드가 호텔 방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칵테일 셰이커로 흔든 술을 라임이 담긴 잔에 따르며 말한다. "미디엄 드라이 보드카 마티니입니다. 젓지 않고 주문하신 방식대로 섞었습니다."(「술꾼의 품격」, 190~191쪽) 그때까지 술의 상식에 비춰봤을 때 튀어도 너무 튀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두 책에 등장하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들의 마티니 제조법에 대해 알아 보자.

헤밍웨이는 통상 3대 1에서 5대 1인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대 1로 해서 마셨다. 존슨 대통령은 잔에 베르무트를 따랐다가 비워버리고 그 잔에 진을 따라 마셨다. 나아가 처칠 수상은 차가운 진을 마시면서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완벽한 마티니라고 했고, 히치콕 감독의 마티니 레시피는 진을 다섯 번 마시고 베르무트 병을 잠깐 흘겨보는 것이다. (위의 책, 191~192쪽)

원자폭탄까지 동원하는 심연섭은 점입가경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섬이라는 맨해튼의 어느 바에서 외국인 기자 몇 명과 어울렸을 때의 일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 화제에 올랐다.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옛날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던 스포이트 생각나나?"
"그 스포이트로 베르무트 한 방울을 떨어뜨리니까 마티니 맛이 되더군."
"그것보다는 주사기가 낫지. 가장 가느다란 바늘인 25호 정도면 베르무트 방울을 훨씬 작게 만들 수 있지."
또 한 친구의 이 비법에 다른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내가 향수 뿌리는 분무기 알지? 그걸 빌리는 거야."
이번에는 듣고만 있던 바텐더가 한마디 거들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어떤 바에 가면 원자原子 마티니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과학자 중에 마티니 애호가가 있어서 네바다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할 때 그 폭탄 속에다 베르무트 한 방울을 주입해두었다는 것이다. 원자탄이 폭발할 때, 그 한 방울이 같이 폭발하면서 대기 중에 퍼진다. 그래서 마티니 만들 때 셰이커 뚜껑을 열고 창밖으로 1초 동안 노출시키면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베르무트의 기가 내려앉는다는 설명이었다. 이름 하여, 그것이 바로 '원자 마티니'.(「건배」, 22~23쪽)

차라리 베르무트를 섞지 말고 진만 알몸으로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에게 심연섭은 말한다. 신사의 체면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벌거숭이 마티니Naked Martini를 마실 수 있겠느냐고.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기 위한 술꾼들의 노력이 가공하다.
내가 보기에 두 저자는 세상 안 마셔본 술이 거의 없을 것 같고 마신 술 종류만큼이나 주량도 대단할 것 같지만 그들의 글에서는 술맛 뿐만 아니라 술멋도 즐길 줄 아는 주당계의 프로페셔널이란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취하려고만 마셔대는 술은 끝내 독이 되지만 보다 멋있고 아름답게 인생을 가꾸려는 윤활유로써 대하는 술은 가히 약주다.
그건 그렇고 이 참에 마티니 한 잔 마시고 싶다. 이왕이면 재즈그룹인 핑크 마티니Pink Martini 음악을 배경음으로 깔아 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름에 마티니가 들어가니 마티니스럽지 않을까 싶어서.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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