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단골 이발사를 모른 척 할 수 없어 지난 달은 거길 들락거리느라 못 왔다며 겸연쩍어하는 큰아버지는 점방 개업한 이래 한 달에 두 번은 꼭 커트와 염색하러 일부러 내 점방을 찾는다. 팔순 노인네가 두 시간 가까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찾는 건 벌어먹고 살겠다고 가리늦게 점방을 차린 조카가 안쓰러워서일 게다. 한때는 부친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안이한 생활방식에 거부감이 일어 집안의 가장 큰어른임에도 백안시하곤 했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어른들처럼 나이가 들어가니 마음 상하고 아니꼬웠던 과거지사보다는 여생을 편히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덧없는 인생인데 버거운 감정을 계속 짊어지고 가본들 무에 좋을손가.
큰아버지의 외아들, 그러니까 우리 집안 장손은 나보다 두 살 아래이고 서울 사는 내 동생과는 갑장이다. 생일이 늦어 막내동생처럼 어릴 때는 셋이서 곧잘 어울려 다녔었는데 커가면서 성향이 달라져 전혀 딴사람처럼 소원해지기에 이르렀다. 가소로운 건 그 성향을 가르는 기준이라는 게 순전히 내 일방적인 편파성에 기인한 바 커 나와 다르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아주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서는 기정사실화했다는 거다. 내가 모르는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된 사촌동생의 내밀한 인생을 단 한번이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안 한 채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일면에만 렌즈를 고정해 줄곧 국부만을 확대하는 춘화적 발상(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구절 참조)으로 그를 철저하게 왜곡한 탓에 겉으로야 동생으로 여겼을지 몰라도 심정적으로 외면하고 배타했던 음충맞음이 어쩌면 숨기기 어려운 나의 본질인지 모른다.
사촌동생은 나보다 두 달 뒤인 올 5월에 고기집을 울산에다 오픈했다. 싸고 품질 좋은 소고기, 돼지고기 공급선을 잡은 김에 무리를 해서 크게 열었다. 개업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도중에 내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자금이 달리기는 했지만 막상 개업하고 나니 친척들 사이에서 '대박' 소문이 자자했다. 큰아버지를 통해서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고 이대로면 2호점도 곧 낼 기세다.
커트점 오픈하고 얼마 안 지났을 즈음 사촌동생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고기점 오픈을 하려는데 주방이든 홀이든 믿고 맡길 만한 매니저급을 구하던 차에 내가 떠올랐다며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떠보는 전화였다. 형 커트점 오픈한 소식 못 들었냐고 핀잔을 주고 전화를 끊었지만 거절의 이유는 정작 딴 데 있었다. 녀석이 하는 거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내 버릇은 여전했다. 네가 해봐야 얼마나 대단할까 폄하하기에만 급급했고. 애들 밑으로 들어갈 돈은 늘어만 가는데 가장으로 번듯한 일자리 없이 빈둥대는 큰형한테 내미는 애틋한 제안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편협함이란.
큰 걱정을 덜었는지 모처럼 얼굴이 환하게 펴진 큰아버지의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고 고백한다. 사촌동생이 하는 일이면 뭐든 평가절하했던 내 옹졸함을 부끄러워했고, 월세 맞추느라 뼈마디가 쑤시는 나에 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출을 갱신하는 사촌동생의 장사 수완이 부러우면서 약오르는 이중성에 혼란스러운. 허나 그딴 잡념 다 버리기로 했다. 그저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하듯 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안녕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듯 사촌동생 내외가 보내는 요즘 하루하루가 그런 날의 연속이길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꼭 들러봐야겠다. 울산 매곡동 <고혼(고기에 혼을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