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골

by 김대일

글을 올리면 곧잘 맞장구를 쳐 주던 인도네시아에 간 용이가 요새는 뜸해 신변에 변화라도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던 차였다. 그제였다. 오후가 다 지나가도록 손님 코빼기라곤 안 보여 드디어 올 게 왔다, 오늘은 공을 치고 마감해야 하나 낙망하려던 찰나, 단골 손님이 들어와 커트와 염색을 주문했다. 이 손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점방 개업하고부터 매달 꾸준하게 커트와 염색을 하는 단골로서 내 점방으로부터 전철 역 두 코스 거리에 있는 주례의 한 커트점에서 내가 1년 반을 알바로 일할 때 이미 안면을 텄던 이다. 안면을 텄다고는 하나 기실 나는 그를 잘 몰랐고 그가 주례 커트점을 찾을 때마다 근무하던(금~일요일만 근무했었다) 나를 눈여겨봤고 내가 알바를 집어치우고 점방을 차리자 자기 동네에 주례 커트점처럼 요금이 저렴한 점방이 생겼대서 가 봤는데 주인이 마침 나라서 그 즉시 단골이 된 경우였다.

어찌 됐든 몇 년을 두고 아는 사이이니 다른 손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물없는 터수여서 제법 속내를 내비치는 말도 주고 받는 편이다. 그는 한국 신발 산업에 남긴 자신의 족적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사내다. 생산 기획 파트에서 잔뼈가 굵었다면서 생산이래도 다 같은 생산이 아니라며 블루칼라이기보다는 화이트칼라임을 유독 강조하는 그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주재원으로 생활한 과거를 자랑스러워했다. 외국에 나간 이력도 자랑이거니와 자신의 역량이 곧 회사의 중추인 듯한, 말하자면 제 분야에서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는 듯한 뻐김 같은 걸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때는 나도 신발 만들어 번 돈으로 해운대 달맞이언덕의 유명짜한 레스토랑과 사우나 찜질방을 인수한 신발 회사에서 사우나 업장 관리를 책임지는 과장 노릇을 한 적이 있어서 신발을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어도 국내 신발회사가 타산을 맞추자니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옮긴 지가 꽤 오래됐다는 정도는 알고 있음에도, 하여 생산 관련해 국내에서 인력을 뽑을 때는 해외 주재가 입사 조건의 기본임을 모르지 않는데도 그는 마치 한국의 신발 산업에 대해서 통달한 듯이 굴었다.

그제 말고 직전에 그가 점방을 찾았을 때 부산에서 짝자그르한 신발 회사 몇몇을 주워섬기는데 용이가 지금 다니는 회사 말고 20여 년 가까이 몸 담았던 전 회사 이름이 나오길래(내가 과장 노릇하던 사우나를 소유한 회사를 말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 회사가 운영하는 사우나의 관리과장으로 나를 수뇌부에서 추천해 준 이가 용이였다. 즉 용이와 나는 한 직장에서 2년 가까이 같이 녹을 먹은 적이 있다) 아는 척을 해줬더니 그가 중국 주재원으로 꽤 오래 일 할 당시 적을 둔 회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현재는 퇴사했다). 그래서 용이 이름을 들먹거렸더니 어느 부서 소속이냐고 물어봐서 인사·노무 파트였다고 했더니 입사가 한참 늦은 사람 같다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녀석도 거기서 20년 가까이 근무했었다고 받아쳤더니 부산 본사 인원은 주로 외국 공장을 서브하는 역할이라 어지간해서는 눈에 안 뜨인다고 눙쳤다. 말하는 품이 용이를 일없이 서류나 만지작거리는 내근직 나부랑이 정도로 치부하는 성싶었다. 볼일 마치고 나가려다 말고 지금 용이는 뭐하냐고 그가 물어보길래 4~5년 전에 다른 신발 회사로 옮겨 그 회사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근무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제 일로 돌아가자. 그는 용이의 이름과 근황을 다시 물었다. 물어본 게 진심으로 용이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용이 근황을 핑계로 '너와 나의 공통된 화젯거리를 화두로 삼아 머리 깎고 염색하는 이 지루한 시간을 때우자'는 심산인 듯 약간은 경박하게 들렸다. 한국 신발 산업에 큰 족적을 남겼고 앞으로도 충분히 일익을 담당할 만한 역량을 보유했다고 자부하는 자의 우쭐함 내지 한우물만 판 사람 특유의 거만함은 여전했다. 나는 용이의 풀네임을 대면서 4~5년 전 옮긴 아무개 회사의 인도네시아 공장을 설립하고 현재는 제너럴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고 다시 설명해줬다. 그러자 그는 용이의 이름과 근황을 다시 물어본 까닭을 늘어놓았다. 요즘은 인도네시아 말을 익혀 두면 요긴하게 쓰이는 데다 몸값까지 올라간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열심히 인도네시아 말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둔 신발 회사 중에 용이가 다니는 회사가 특히 유명한데다 마침 친한 지인이 그 회사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근무하는지라 머리 깎으러 점방엘 들르면 물어볼 요량이었단다.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용이가 분명 후배임에 틀림없으니(그는 자기 입으로 57세라고 밝혔다) 혹시 그 회사에 입사를 해 인도네시아 현지 주재원으로 가게 되면 생산 공장의 중간 나부랑이쯤 될 용이를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겠다는 나름의 계산이 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염색을 다 발라 가는데 새로운 손님이 입장하는 바람에 그와의 대화는 그쯤에서 끊겼다. 그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휴대폰을 들어 연신 손가락을 놀려댔는데 아마 인도네시아 공장 지인과 접선해 용이의 존재를 확인하려 드는 성싶었다. 새로 온 손님도 염색을 해달래서 브러시로 한창 발라 대는데 등 뒤에서 그가 "관리이사시라네요 김○용 님께서"라며 갑자기 수굿해진다. 세면대에서 염색한 머리를 감겨 주면서 인도네시아 말 부지런히 배워 도모하시는 일 꼭 이뤄지길 바라며 혹시 용이 회사와 연이 닿는다면 내가 다 뿌듯하겠다고 덕담을 건넸더니 자신만만함이 넘쳐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던 사람이 "고맙습니다. 기회가 되면 열심히 해야겠지요" 아주 공손하게 대꾸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나는 분명히 제너럴 매니저라고 밝혔고 그 직함이 '회사나 호텔 따위에서 업무의 총괄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 즉 수뇌부의 일원임을 그는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그럴 리 없다고 현실을 부정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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