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먹었다는 젊은 사내는 딕션이 정말 좋았다. 기름기 동동 뜬 고깃국마냥 유들유들하고 낭창낭창한 목소리와 발음은 귀에 쏙쏙 박혔다. 무엇보다도 말하는 데 꾸물거림이 없어서 속이 다 후련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신발 공장 제너럴 매니저로 활약 중인 용이나 용이와 함께 법학을 전공했지만 인테리어 사업에 여념이 없는 완이 외에 정확성과 유창성을 겸비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는 나는 머리를 깎는 와중에도 그 젊은이의 입을 계속 놀리게 하려고 내가 더 많이 씨부려댔다.
제5부두와 경부고속도로 입구인 구서 나들목을 잇는 번영로(혹은 부산 제1도시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화도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부산에도 예술 가르치는 학교는 있다고 항변이나 하듯 예술대학교 이름이 박힌 간판이 하나 보인다. 젊은이는 연기가 하고 싶어 바로 그 학교 연극과에서 수학하다 졸업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 부산의 한 극단에 들어갔으나 역병이 창궐한 요 몇 년 간 제대로 된 무대 한번 서지 못하고 학생들 상대로 한 금연 캠페인 연극 따위에 출연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이다. 배우 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 진로를 고민중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사람을 제대로 짚었다.
이래 봬도 대학 다닐 적에 세 번이나 연극 무대에 올랐던 아마추어 배우였다고 하자 반색을 하는 젊은이. 무대에만 서면 설레고 흥미진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무대가 내 자리가 아님을 뼈저리게 깨친 경험이기도 했다고 말하니 "아니, 왜요?"라면서 연기자 특유의 과장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혀가 짧은지 발음이 어눌하고 부정확한데다 음색마저 탁해 매끄럽게 들리지 않아 배우로는 함량 미달임을 절감해서라고 대답했더니 "난 듣기 좋은데" 시무룩해지는 게 이번에는 못내 아쉬운 척 연기를 하는 성싶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연극에 푹 빠져서 이거 아니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지독한 열정 같은 게 별로 일지 않아서 그저 대학 시절 즐거운 추억 조각 하나 여투어 뒀을 뿐이지만 더 사족은 안 달았다. 열렬하지는 않았어도 무대에 섰을 당시만은 진심이었음에도 말 길어져봐야 궁색한 변명 같아서리.
마침 전날 저녁 유재석과 조세호가 MC를 보는 TV프로에 배우 진선규가 게스트로 나온 게 기억이 나 젊은이 기운도 북돋아 줄 겸 개똥철학 같은 '연극배우 예찬론'을 마구 쏟아냈다. 가수에서 배우로 전업해 성공을 거둔 아이돌이 드물지 않다.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면 배우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써 가수를 활용했다는 혐의가 짙다. 호소력 넘치는 노래 실력과 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현란한 율동이 연극 무대에서 표현되는 대사, 연기와 도긴개긴, 피장파장이라 치면 물 들어올 때 노를 젓 듯 아이돌 가수로 반짝 흥행을 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터득한 무대 체질을 브라운관에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연착륙에 성공한 그들은 참으로 영악하다. 또 그들 거개가 바쁜 일정에도 연기 수업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연기 감을 익혔다고 극구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이 절대 운이 아님을 강조하는 데에 반론을 제기할 마음 전혀 없다. 허나, 연극 무대와 노래, 춤이 어우러진 무대가 과연 연기력의 함양 측면에서 비교 대상이냐 하는 점에서 대학 다닐 적에 세 번씩이나 연극 무대에 올랐던 아마추어 배우 출신으로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고리타분하고 래디컬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강조하는 바는, 연극 무대에서 체득한 연기의 진수로 무장되어 있어야 진짜 배우다. 연극만이, 연극이라야 발산하는 극적 긴장감에 흠뻑 적셔보지 않고서 자신을 배우라고 감히 내세우는 자는 연기자라기보다는 연기를 흉내낼 줄 아는 경박한 엔터테이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군다나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숱하게 흘린 피, 땀, 눈물의 과정을 경험해본 적 없는 얼치기 배우라면 연기란 천민자본주의 하에서 떵떵거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일종의 기능으로밖에는 취급하지 않을 저열한 연기관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여 나는 연극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지 않은 자를 배우라고 인정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제 연기에 확고한 철학을 담으려면 눈물 젖은 빵을 수태 먹어봐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척박하기 그지 없는 한국 연극계를 꾸역꾸역 추동하는 이 시대 모든 연극배우들은 언제고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진선규를 봐라. 연극계 슈퍼스타로 날렸다는 그이지만 십수 년 오랜 무명 생활을 거쳐 이제야 빛을 보게 됐지 않나. 그의 성공이야말로 배우로 투신하려는 이들에게는 진정한 표상이다.
이건 뭐 숫제 몇십 년 연극물을 먹은 선배가 후배 앉혀놓고 훈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젊은이 아주 안 와닿는 화제는 아니어서인지 호응은 좋았다. 곧 사촌형 결혼식이라 머리라도 단정히 해서 식장에 가야 지금 뭐 하냐,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겠냐 따위 친척들 추궁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떠는 젊은이는 깔끔한 상고머리를 해서 점방 문을 나섰다. 들으니 집이 좀 먼 데라 자주 오겠다는 다짐에도 썩 미덥지는 않았다. 이름을 물어볼 걸 그랬나. 혹시 아나,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