뻗치는 머리라서 높고 짧게 깎아달라고 주문한 손님이었다. 흔히 장교머리라고 불리는 높은 상고가 적당하겠다 싶어 열심히 깎아댔다. 가이드라인이라고 부르는 머리선은 통상 U자 라인이다. 옆머리 높이에 따라서 뒷머리 선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그 높이는 손님 두상을 보고 깎새가 판단한다.
무난하게 깎는 중이었다. 뒷머리 숱이 무성한 걸 쳐내는 빗 놀림이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 들 수야 있겠지만 두상에 안 맞게 가이드라인을 치켜올릴 저열한 기량은 이젠 아니다. 그런데 너무 높이 깎는 거 아니냐는 짜증이 묻어나는 손님 목소리가 별안간 점방 공기를 가르자 빈정이 상한 깎새다. 뒤통수에 눈이 안 달린 이상 높이 깎는지 낮게 깎는지는 닿는 빗의 촉감으로 짐작할 뿐인데 다시 말하지만 적정선을 지키는 중이었다.
낯이 설어 처음 들른 손님인 줄은 진작에 파악했지만 머리를 맡긴 깎새를 못 미더워하는 게 역력한 행상머리에 배알이 꼴린 나머지 "적당하게 깎는 중인데요" 퉁명스레 대답하면서 더 이상의 교감을 불허하는 차단벽을 치려 하자 거울 속에 비친 손님 표정으로 미루어 심기가 영 불편한 눈치였다. 이런 유형의 손님은 깎새 앞에서 점잖은 척은 하지만 한번 낙인을 찍었으면 발걸음을 다시 할 위인이 절대 아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라 퉁치면 그만일 테지만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건 또 아니라서 작업하는 내내 다음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숙고했다.
선택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오늘 보고 아니 보겠다 다짐했으면 손님이 퇴장할 때까지 새침하게 굴기, 그게 아니라면 손님 한 사람이 아쉬운 판국에 빌어먹을 자존심일랑 집어치우고 재방문율을 제고하기 위한 태세로 전환하느냐.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깎새만큼이나 손님이 느끼는 깎새의 첫인상도 별로인 건 확실하다. 그 첫인상을 호감으로 바꿀 방법은 커트점에 한해서는 머리를 가지고 푸는 방법밖에 없다. 뻗치는 머리는 깎을 만큼 깍았는데도 한번에 'OK!' 사인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각이 졌으니 두루뭉술하게 다시 고쳐 달라는 요구가 안 들어오면 오히려 서운하다. 머리카락이 안 자라는 게 아니니 하루이틀이면 또 삐져나올갑세 커트점에서만이라도 그 놈의 뻗치는 걸 모조리 잡고 싶은 심정은 아는 사람만 아는 뻗치는 머리의 애환이다. 그걸 잘 아는 깎새가 선수를 치기로 했다.
-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릴 테니 말씀만 해 주세요.
- ?
- 선생님 머리 스타일을 가진 손님들 스트레스를 잘 압니다. 암만 잘 깎아도 튀어나온 것 같고 그게 또 그렇게 스트레스라는 걸 말입니다. 그러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원하는 대로 깎아드릴 테니.
- 아, 예. 여긴 오늘 처음이라. 원래는 가던 데가 있는데. 제 스타일을 잘 모르시니 뒷머리도 높이 깎은 것 같고.
- (뒷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보여주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뒷머리를 정리하느라 빗놀림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 그렇지 가이드라인을 높이지는 않았어요. 한번 보세요.
- 아, 그렇네요.
- 다음에 오시더라도 마음에 안 드시면 주저없이 말씀하세요. 이왕 여기까지 발걸음하셨는데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깎아드려야 되지 않겠어요? 다른 손님이 대기하고 있으면 좀 곤란하지만 오늘처럼 널널하면야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둘 사이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제법이다 손님 다루는 요령이. 두고보자. 이 손님 다음에 다시 찾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