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열일고여덟 살 적에 연암 박지원은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근대적 질병이라는 우울증을 포스 넘치는 연암이 앓았다는 게 전위적이지만 치료법도 아주 파격적이었다(고미숙). 「민옹전」은 연암이 만난 민옹이라는 기상천외한 이인異人의 이야기이자 연암의 질병이 치유되는 임상 보고서이면서 유머와 역설의 향연이다.
기발한 것을 발견해 눈이 뒤집어져서는 베끼는 데 열일인 나는 모처럼 기분이 무척 좋다. 연암의 우울증을 민옹이 어떻게 고치는지 그 활약상을 함께 즐겨 볼까나.
민영감이 물었다.
"당신은 무슨 병이 들었수? 머리가 아픈거유?"
"아니오."
"배가 아픈 거유?"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병이 아니라오."
그는 곧 지게를 열고, 들창을 걷어 괴었다.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자 내 마음이 차츰 시원해져서 예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그래서 민영감에게 실토했다.
"나는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밤에는 잠을 못 잔다오. 이게 바로 병이지요."
민영감이 몸을 일으켜 나에게 축하하는 예를 올렸다. 내가 놀라면서,
"영감님, 무엇을 축하하신단 말이오?"
"당신은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 먹기를 싫어하니 재산이 남아돌게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다행히도 곱절을 사는 셈 아니겠소?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곱절을 살면 오복 중에 수壽와 부富 두 가지를 갖춘 거라오."
얼마 뒤에 밥상이 들어왔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골라서 냄새만 맡을 뿐이었다. 민영감이 갑자기 크게 성내며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영감님, 왜 노해서 가시렵니까?"
"당신이 손님을 불렀으니 손님에게 먼저 음식을 권해야지 어째서 혼자 먹으려고 하오? 이건 나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오."
나는 사과하면서 민영감을 붙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빨리 밥상을 올리게 하였다. 민영감은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붙였다. 숟가락과 젓가락에 음식을 가득 올렸다. 나는 저절로 입안에 침이 흘렀다. 마음이 시원해지고, 코밑이 트였다. 그제야 옛날처럼 밥이 먹혔다.
밤이 되자, 민영감은 눈을 감고 단정하게 앉았다. 내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걸었지만, 그는 더욱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몹시 무료하였다. 한참 뒤에 민영감이 별안간 일어나서 촛불 똥을 긁으며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엔 눈에 스치는 글마다 곧 외웠지만 이젠 늙었다오. 그래도 당신과 내기를 해 보리다. 평생 보지 못한 책을 뽑아 내어 각기 두세 번 눈으로 훑어본 뒤에 외워 봅시다. 만약 한 글자라도 잘못되면 벌을 받기로 약속하는 게 어떻겠소?"
나는 그가 늙었음을 기화로 하여
"그러지요."
대답하고는 곧 시렁 위에서 『주례』를 뽑았다. 그 책에서 민영감은 「고공」편을 골랐고, 나에게는 「춘관」편이 돌아왔다. 잠시 뒤 민영감이
"나는 벌써 다 외웠다우."
하고 나를 일깨웠다. 나는 아직 한차례도 훑어보지 못한지라 깜짝 놀라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 영감은 자꾸만 재촉하여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나는 그럴수록 외울 수가 없었다. 졸리운 듯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하늘이 밝은 뒤에야 민영감에게
"어제 외운 글을 기억하시오?"
물었다. 민영감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외우지 않았다오." (박지원, 「민옹전」)
사람들이 두려운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민영감의 대답이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한테 건넨 말과 얼추 비슷하다. 현명한 자들은 통하는 법이다.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 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쪽 눈은 용이 되고 왼쪽 눈은 범이 되며, 혀 밑에는 도끼를 감추고 있고 팔을 구부리면 당겨진 활과 같아지지. 차분히 잘 생각하면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으나,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짐승 같은 야만인이 되고 만다네.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죽이거나 베어 버릴 것이야. 이런 까닭에 성인께서도 이기심을 누르고 예의를 따르며, 사악함을 막고 진실된 마음을 보존하면서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북드라망, 101쪽)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가 느끼는 바를 말했다.
"얘야, 마치 내 가슴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할아버지의 가슴속에서 이기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