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찬 행복

by 김대일

슬로바키아에 사는 영화배우 류승범은 봄이 되자 겨우내 창고에 처박아 둔 자전거를 꺼내 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슬로바키아인 아내와 세 살 난 딸이 그 옆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고 웃는 모습에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018년 5월 어느 일요일 똑같은 기분을 느꼈었던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요행히 그날의 기록을 남겨 뒀기에 소소하지만 벅찬 행복감의 정체를 어설프게나마 밝힐 수 있다.

일요일 아침 메뉴로 청국장찌개는 몹시 투박하지만 맛까지 볼품없진 않았다. 처갓집 청국장은 내남없이 즐겨 먹는 집안의 별미로 그날따라 유난히 구수한 풍미가 침샘을 더 자극했다. 체중 감량 특명을 하달한 뒤 끼니때만 되면 흡입하는 양을 일일이 재는 마누라의 쌍심지 때문에 수저질이 영 껄끄럽지만 쉬 가시지 않는 청국장 냄새와 마누라 잔소리, 그러거나 말거나 코 박고 먹기 바쁜 두 딸의 무심한 얼굴이 불현듯 생경해서 순간 놀랐다.

​밥 다 먹자 도서관으로 휑 가 버린 큰딸이 서운했지만 오매불망 바라던 스티커를 사주겠노라 새끼손가락 걸고서야 운동화를 신은 5학년짜리 막내딸과 부부는 장산 초입 대천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파트단지 사이로 난 개울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따라나선 막내는 어느새 엄마랑 팔짱을 끼고 수다가 한창인데 마누라대로 아랫배 잡고 웃다가 쓰러질 뻔한다. 마누라의 파안대소가 녹음 짙은 5월의 일요일과 닮아 보였다.

​공원 계곡물에 발 한 번 담근 뒤 매점으로 가 3개 2천 원 하는 오뎅을 6개 사서 나눠 먹었다. 떡 좋아하는 막내딸은 떡 2개를 게 눈 감추듯 헤치우고도 엄마 오뎅까지 뺏어먹고는 ‘엄마, 배고파’ 찡찡거린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도 한참 지나긴 했다. 공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목 재래시장엘 들러 손두부, 우뭇가사리와 콩국을 샀다. 일전에 볶은김치를 얹어 맛있게 먹은 여운이 남아 있어서 망설일 것도 없었다. 삶은 옥수수를 좋아하는 마누라이지만 모처럼 긴 산책으로 피곤했는지 단골 가게 문이 닫힌 걸 아쉬워만 할 뿐 귀가를 재촉한다.

​얼른 두부를 썰고 볶아 둔 김치를 꺼냈다. 시장기로 눈이 돌아간 두 모녀는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젓가락질로 바쁘다. 소금으로 약간 간을 한 우뭇가사리 콩국 한 그릇까지 마저 비우고도 막내딸은 입을 다시다가 급기야 비빔면을 만들어 달라고 성화다.

​물 올리고 가스불을 켜면서 문득 불안했다. 이거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냐?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낯선데? 그러다가 피식 바람 빠지듯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한정없이 길어지면 곤란하겠지만 당분간만이라도 이 행복한 게으름을 마음껏 누릴란다. 싱그러운 봄날을 닮은 마누라와 딸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게 말이다.(2018.05.28. 쓴 글 조금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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