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을 듣고 있고 내게 전해졌다

by 김대일

신형철은 칼럼에서 "우리 사회는 왜 공정하지 않은 겁니까?"라는 질문에 정치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그런 생각이 드시나 봐요"라고 응대하는 데까지는 이르렀으나 불공정의 근원적 병인을 제거하지 않고 증상만 관리하는 대증요법으로 표를 얻고자 하는 건 청년들의 불안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칼럼은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청년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감정과 고통의 듣기 평가가 필요하다고 설파하면서 그 유명한 사례로 한 설문 내용을 들었다.(<신형철의 뉘앙스-감정과 고통의 듣기 평가>, 경향신문, 2021.07.12.)

환자가 "저는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요"라고 물을 때 의료진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일본에서 터미널 케어(말기 암환자처럼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행위)에 종사하는 의료진을 대상으로 행해졌다는데, 의사와 의대생들 대부분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용기를 내셔야죠."를, 간호사와 간호학과 학생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란 대답을 택했다고 한다. 특별하게도 정신의학과 전문의들만이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그런 기분이 드시나 봐요."란 대답을 택했다는 거다. 환자의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 무의미한 대응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는 건, 환자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내 불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바로 그것에 확실한 답이 되어 주는 반응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내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환자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행위의 첫 번째 핵심은 듣고 있음을 알려 주는 데 있다고 유려한 문장가로도 소문난 문학평론가는 단정한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고 내게 전해졌다…정신과 의사도 아닌 내가 그들과 비슷한 어법을 쓰던 때가 있었다. 지자체 일자리센터 직업상담사로 9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그 중 6개월을 관할 고용센터로 파견을 나갔었다. 부산 동북 지역 5개 구군을 담당하는 고용센터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일자리를 희망하는 구직자를 상담하거나 일자리를 알선하는 거였다. 고용센터 내방객을 대상으로 한 일자리 상담은 거개가 일회성에 그치는데 그는 보름에 한 번 꼴로 나를 찾았다. 7년을 다니던 빌딩 경비원을 막 그만뒀기 때문이었다. 당시 쉰 아홉이었던 그는 계속 일하고 싶어했다. 실직 후 밥집을 운영하는 배우자를 돕고 있지만 그게 부부에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서로가 잘 알기 때문에 가게보다는 구직활동하러 밖으로 나도는 일이 더 잦다고 말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는데 발달장애를 앓는 아들은 장남이었다. 함께 살 수 없는 처지라 발달장애인 시설에 맡긴 뒤 틈 날 때 며칠씩 집에 데려오는 게 다였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두 아들을 사랑하며 성치 않은 큰아들과 같이 살고 싶어했다. 그러자면 하루라도 빨리 일터를 구해 힘껏 일해야겠는데 일자리센터 창구에 앉은 당신이라면 이런 내 바람을 충분히 알아서 뭔가 좋은 수를 내줄 것 같다고도 말했다.

어수룩하면서도 우직해 뵈는 그가 창구에 앉을라치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눈을 응시하곤 했다. 문해력이 달리는 그를 위해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간단하게 질문한 뒤 말투가 어눌한 그가 대답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만약 여건 상 질의응답이 수월하지 못하면(통상 한 구직자 당 20~30분 정도 소요되나 내방객으로 붐비는 고용센터 창구는 그 시간이 현저하게 쪼그라들 때가 잦다) 그에게 종이에다 써서 다음 번에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당신의 말과 글은 꼭 듣고 보겠노라 약속하면서. 그는 몇 달 뒤 취업했다. 3교대로 돌아가는 중형 빌딩 경비원직이라고 했다. 내가 그 일자리를 알선한 건 아니었다. 그가 직접 다리품 팔아 찾아낸 일자리였다. 첫 출근 전날 나를 찾은 그는 내게 고맙다고 했고 다음 번엔 큰아들과 같이 오겠다고도 했다. 아빠가 만난 사람을 자랑할 겸. 내가 해준 건 별로 없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듣고 있던 내 눈동자를 보니 더 고마웠다고. 진짜 듣는 것 같아서. 눈은 못 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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