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by 김대일

추석날 본가에서 점심 식사까지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모처럼 근사한 데서 찻잔이나 기울이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네 식구가 몰려간 데가 'F1963'이었다. 한 제강회사 공장을 리모델링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것인데 전시장 겸 공연장, 도서관, 카페, 레스토랑 따위가 들어서 있다. 부산 핫플레이스 중 한 곳으로 각광을 받는지 나들이 나온 인파들로 들끓었다.

도떼기시장을 방불하는 카페 내부에서 차 마실 엄두가 안 나던 차에 마누라가 차는 관두고 주변이나 구경하자고 해서 옳거니, 카페를 얼른 나와 발걸음을 옮긴 데가 국제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이었다. 국제사진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여러 나라 사진가들이 출품한 기기묘묘한 사진이 즐비했다. 하지만 낫설지 않은 앵글로 낯설지 않은 피사체를 포착한 낯설지 않은 흑백사진 외에는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최민식 선생(1928~2013) 작품들이었다.

<외발 신문팔이>(1985)를 처음 접했을 때 충격적인 감동에 휩싸인 기억은 생생하다. 최민식 선생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 - 부산,1985. 시내 극장가에서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없는 불구자가 성한 사람들보다도 더 빨리 뛰면서 신문을 팔고 있었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버스가 들어오면 재빨리 달려가 하차 승객들에게 신문을 팔더군. 몸이 어찌나 날래던지. 외신기자들도 그의 모습을 여러번 촬영했다고 하더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더운 날에나 추운 날에나 한결같이 그 남자는 뛰었어. 삼 년 동안 이곳에서 일한 청년은 하루의 수입이 꽤 짭짤하다고 하더군. 어느 날부터는 그가 보이지 않는거야.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변두리에 구멍가게를 차려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어.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

내 작품 중에는 신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신문은 당대의 기록이자 리얼리티 그 자체지. 신문이 사진 속에 피사체로 들어오면 사실성을 더 높이는 작용을 하지. 저 신문팔이 청년, 부디 복 받아 잘 살고 있어야 할텐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할텐데, 요즈음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병들어 가는 세상이야. 몸은 불편해도 정직한 정신을 가진 저 청년, 저 얼굴을 한 번 유심히 들여다 보게.​


​ 사진 속에 등장하는 시대상時代相을 유영하는 다큐멘터리적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내력이 나는 궁금하다. 피사체로 포착될 무렵 그 인물이 처한 처지가 또 궁금하며 왜 하필 그이를 렌즈에 담으려 했는가도 몹시 궁금하다. 나아가 사진가가 다큐멘터리적 인물을 앵글로 재조명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그 속뜻이 궁금하다.

화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밀항한 최민식 선생은 헌책방에서 에드워드 슈타이켄 사진집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되려는 꿈을 접었다고 한다. 대신 그때부터 헌 카메라를 사 독학으로 공부하며 사람만을 필름에 담았다고 밝혔다. 1957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고아원 '소년의 집'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가 길로 접어든 선생은 인생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 서민의 모습을 많이 담았다. 황해도 연안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가난이라는 상처가 사람의 영혼을 묶고 모든 희망을 근거 없이 수포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선생은 사진을 통해 자신이 목격한 남루와 고통의 실상을 증언함으로써 위정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그들의 무관심을 고발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고도 했다(<부산이야기>, 2004년 9·10월호 인터뷰에서)​.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어둡고 남루한 대한민국 이면을 자꾸 들춰내는 사회 고발적 사진을 찍는 탓에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선생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일생의 주제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집이 있는 남구 대연동 재래시장에서 문현교차로, 부둣길, 중앙동을 지나 자갈치시장, 광복동, 남부민동, 송도, 영도로, 어떤 날은 광안리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거쳐 송정, 기장 일대를 돌고, 또 어떤 날은 온천장을 거쳐 노포동으로, 때로는 구포 김해 밀양 삼랑진까지 순전히 발품만으로 가난한 사람을 담은 선생은 소설가 조세희가 말했듯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초기 작품에는 딸린 제목이 따로 없다는 안내가 괜히 서운하던 중에 한 사진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외발 신문팔이>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적인 감동이 되살아났다. 성은 김이요 이름 끝 자가 석인 29살 청년은 맹인인 성싶었다. 우쿨렐레인지 기타인지를 조악하게 본떠 만든 악기로 연주를 하며 동정을 바라는 모습이 찍혔다. 문득 임응수 작품 <구직求職>이 떠올랐다. 목에 두른 '求職'이란 명패로 절망적인 현실을 극대화시키면서도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감정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청년에게서 투쟁적인 오기가 엿보이는 사진 말이다. 29살 맹인 목에도 동정을 바랄 수밖에 없는 사연이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는 명패가 걸려 있다. 하지만 그 동정이란 '괴로움과 절망을 이기'기 위한 호의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존심이 역력해 <求職>과 포갤 만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에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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