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여러 종목 중에 '7인제 럭비'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야구나 축구 규칙만큼 눈에 익지가 않아 디테일한 재미까지 죄 누리지는 못하지만 맨몸으로 부딪치며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선수들을 보면서 다른 어떤 종목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원초적 쾌감에 달떴다. 게다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뒤로 하는 패스로 철저하게 절제하는 룰은 예의 바른 신사도를 닮아서 원초성과 확연히 대비가 돼 신선하다. 고로 매력적인 구기종목이 아닐 수 없다.
럭비를 눈앞에서 직접 본 때는 대학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당시 '넉넉한 터'라고 이름 붙여진 대운동장에서 체격 다부진 남학생 무리들이 짧은 유니폼만 달랑 입은 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죽을 둥 살 둥 밀어대고(스크럼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꼭 달걀처럼 생긴 길쭉하고 둥근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도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꼴이 우스꽝스럽다가도 축구와는 다른 이단적인 매력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넉넉한 터'라는 데가 축구장 두어 개를 너끈히 품고도 남을 드넓은 운동장이라서 어떨 땐 럭비하는 맞은편에서 미식축구 동아리도 따라 연습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헬멧에 온갖 보호장비를 다 갖춘 미식축구에 비하면 맨몸으로 뛰고 차고 구르는 럭비가 볼품이 있을 리 없음에도 이상하게 미식축구는 안중에 없었다. 어쩌면 타원형 공을 가지고 노는 건 똑같지만 미식축구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원초성이랄지 순수성으로 해서 완전히 격이 다른 스포츠라고 함부로 규정지어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스포츠뉴스 헤드라인이 돈벼락 맞은 야구, 축구 선수로 늘 도배되는 바람에 비인기종목이 찬밥 신세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비인기종목 선수들처럼 럭비 선수들도 돈보다는 명예와 자존심으로 버티는 우직한 위인들일 게 뻔하다. 수십수백억 연봉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되는, 호모 루덴스만이 느끼는 희열에 대리 만족하는 나는 그들을 추종하지 않을 수 없다. 럭비를 경배하라!
럭비하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잘 아는 형한테 들은 우스개소리인데 예전에 글로 남겼었다. 교감선생님으로 곧 영전할 그 형은 소싯적에 제법 날렸던 럭비 선수였고 여전히 럭비빠다. 럭비 얘기를 하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예전 글 살짝 고쳐 다시 남긴다.
<절대로 강요하지 않아>
체육교사인데도 이선생은 타인과 뒤엉켜 부대끼는 거라면 그게 무슨 운동이건 간에 질색한다. 그런 그가 한때 대통령배 전국대회 준우승(2부 리그)에 빛나는 대학 럭비부의 일원이었고 몸과 마음이 자꾸 따로 노는 듯한 분리감에 부담스러워할 나이가 됐음에도 럭비공만 보면 여전히 트라이를 향한 불타는 투지가 용솟음치는 럭비빠라는 건 아이러니하다. 우연찮게 이선생이 럭비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들었는데 하도 기발해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이선생이 체육교육과에 당당히 합격하고 고3 마지막 겨울방학을 느긋하게 보내던 1월 어느 날이었다. 과 선배라면서 연락이 왔다. 기껏해야 한두 살, 예비역이래봐야 서너 살 더 먹었을 선배라는 작자는 한껏 위엄이 서린 반말조로 용건을 밝혔다. 체육교육과 신입생은 입학 전 동계훈련이란 걸 참가해야 하니 다음 날 바로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만약 지엄하신 선배 명령을 거역한다면 앞으로 펼쳐질 대학생활에 엄청난 파란이 일 거라는 뉘앙스를 수화기 너머로 스멀스멀 풍겼더랬다. 목소리만으로도 선배 등쌀에 질려 버린 이선생은 다음날 운동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고 이선생과 매한가지 이유로 불려 나온 신입생 7~8명이 옹송그린 채 눈치만 살피고 있었더랬다.
그들을 부른 선배는 체육교육과이면서 럭비부 소속이라고 밝혔다. 그러고는 운동장에서 럭비 훈련하느라 여념이 없는 선배 무리를 가리키면서 밑도 끝도 없고 썩 궁금하지도 않은 '럭비 실력과 동계훈련의 상관관계'를 아주 진지하게 설파했다. 이른바 럭비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었던 셈이다. 럭비란 무엇이고 동계훈련은 또 무엇인지 한참 떠들고 나서는 큰 타조알 같은 럭비공을 휙 던져 주고는 선배 무리와 뒤섞여 그 한겨울에 땀 뻘뻘 흘리도록 굴리는 게 아닌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에멜무지로 럭비공이랑 씨름하고 났더니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그만하고 다 같이 목욕탕이나 가자는데 안 따라올 간 큰 신입생이 누구냐는 듯이 쌍심지를 세워서 안 따라가고는 못 배기겠더란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발가벗고 탕 안에 둘러앉은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이선생을 불러낸 선배란 작자가 꺼낸 럭비부원 선발의 변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성인으로서 우리는 절대 강제로 운동(럭비)을 시키지 않는다. 대신 지금부터 너희들은 셋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셋 중의 하나라니까 일단 선택의 폭이 넓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첫 번째 럭비, 두 번째 수중발레, 세 번째 군 입대."
선배 제안에 군 입대로 화답한 신입생이 없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결단코 강제가 아니고 자청(?)해 럭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럭비로 덕을 톡톡히 본 이선생인지라 럭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를테면 우연찮게 출전한 대통령배 럭비대회(2부)에서 준우승을 했고 그 경력이 임용시험에서 가산점으로 크게 반영돼 의외로 순조롭게 교직에 들어섰으니 럭비공이 이선생에게 큰 선물을 안긴 셈이다.
체육교사이지만 이선생은 단 한 번도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제로 운동을 시킨 적이 없다.
“오늘은 자율 체육시간이다. 원하는 종목을 선택해서 실컷 즐겨들 봐라. 첫 번째 00(이 선생이 원하는 종목), 두 번째 수중발레, 세 번째 마라톤.”
이상한 건 학생들이 원하는 종목이 항상 이 선생이 원하는 종목이랑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