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by 김대일

한국어를 국어라고 부르는 관행에는 자존自尊의 동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고종석은 주장한다. 국어라는 이름에서는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고쿠가쿠: 일본 고전 문헌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하를 선양하려던 17세기 이래 학풍)의 메아리가 울린다고도 했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자들(고쿠가쿠샤)이 중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을 자기들 학문의 심리적 밑받침으로 삼았듯, 한국의 국학자들도 외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에 자기들 학문을 다져 왔기에 '국학', '국어,' 국사', 국문'이란 표현은 곧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념적 표현이라면서 말이다.

리버럴리스트를 자임했던 고종석으로서는 국어라는 말에 담긴 자기 중심주의, 주관주의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 알맞지 않다고 여겨서 개인적으로는 국어라는 말보다 한국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고 명토를 박았다. (『국어의 풍경들』, 문학과지성사, 1999, 15~16쪽)

사설이 길었다. 국어국문학과를 제 발로 들어갔지만 그 과가 한국 문학만을 가르치는 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학하고서야 알았다. 반듯한 졸업장은 전공 필수 과목을 모두 이수해야만 나오는데 그 절반이 국어학이었으니 아이고, 이 일을 어쩐다? 훈민정음 서문이야 노래 부르듯 읊어지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칠판에 그려 놓은 사람 발음기관을 보면서 '연구개음, 경구개음, 치조음, 순음, 후음' 따위를 외우라고 하니 차라리 인체 해부도를 외우지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던 고등학교 국어 문법 시간은 악몽 그 자체였다. 그 악몽이 또 4년 내내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거니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마지못해 임하는 수업 결과가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낙제를 겨우 면한 학점을 따고도 남들 다 하는 재수강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졸업한 과를 '국어'가 빠진 '국문학과'로만 기억되길 바랐다.

나이를 먹어서 이로운 점도 있더구먼. 유연해진다는 것. 난감하고 거북했던 기억들로 경색되어 버린 고정관념을 무르게 만들 줄 아는 정서적 여유는 무척 긍정적인 변화다. 이 나이에 국어학을 접하는 내가 그렇다.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꽤 오래 전부터 은은하게 스며든 우리말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크나큰 행복이자 행운이다.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다 안다고 착각해 알려고 하지 않던 우리말이 주는 언어적 우수성에 까무러칠 만큼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것을 구현해 낸 한글(노마 히데키 표현을 빌자면 논리적인 지知이자 완전히 새로운 미를 창조하는 게슈탈트(형태)의 변혁)도 결코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한글날이 가까워져서 그런 건 아니었고 정말 우연히 집어든 책이 공교롭게도 『한글의 탄생』(노마 히데키 지음/김진아, 김기연, 박수진 옮김, 돌베개, 2011)이었다. 나온 지 십 년이 넘은 책을 구입한 뒤로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원래 한국어와 한글을 거의 모르는 일본어 화자를 대상으로 쓴 것으로 한글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에서부터 언어와 문자에 관한 전제까지 차근차근 풀어가는 게 책의 주요 내용이다. 헌데 '언어'라는 단어가 나오니 눈치챘겠지만 언어학을 다루는 대목에서 번번이 나는 책읽기를 그만뒀다. 예의 못난 울렁증이 도져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 재밌게 다 읽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명민한 일본 언어학자까지 푹 빠지게 만든 우리말과 한글을 지금보다 더 넓고 깊게 파고들겠다고.

우리말과 한글은 내게 첫사랑의 두근거림처럼 새삼스레 다가왔다. 단언컨대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사람이다.

<학이 운다>라는 것은 한자한문이 어떻게든 쓸 수 있다. 본래 새라는 대상을 본뜬 <상형>이야말로 한자의 발생론적인 근거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한자한문이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이 운다>라는 '모습'이었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들려오는 한국어의 <학의 소리>가 아니다. 찰나를 슬피 우는, 혹은 천년을 서글피 우는 그 <소리> 자체를 그려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음 그 자체를 형상화形象化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를 <형태>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만 한다. <모어>를 <형태>로 만들어야만 한다.

<용음합자 用音合字>라는 ,음으로써 글자를 합치는 시스템이야말로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이었다.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쓴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로, 한자를 빌린 표기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일상 언어 구석구석에서 숨 쉬는 오노마토페를 <쓰는> 순간이란 『훈민정음』의 머리말인 세종 어제御製 서문에서 말한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힘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진정한 <나ㆍ랏:말씀=조선어>를 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노마토페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해진 언어>를 표기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두 번째로, 언어음을 초성ㆍ중성ㆍ종성, 그리고 악센트라는 사분법에 의해 분석 종합하는 <용음합자>라는 시스템이야말로 의성의태어의 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내는, 압도적인 우위를 보여줄 수가 있다. <소리>의 모든 것을 <형태>로 만들 수 있다는 우위. 고유어의 모든 것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우위.(『한글의 탄생』, 252~253쪽에서)

<덧붙이기>

오노마토페onomatopee는 의성의태어를 뜻한다. 우리말처럼 의성의태어가 차고 넘치는 말도 없다. 그 말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낸 게 한글이다. 요즘 내 관심사는 우리말 의성의태어를 찾아내 머릿속 어휘 저장고에 담은 뒤 글을 쓸 적마다 꺼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우리말 의성의태어를 보고 있노라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경이롭기 그지없다. 파생의 미학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비뚤비뚤, 배뚤배뚤, 삐뚤삐뚤, 빼뚤빼뚤, 왜뚤비뚤, 왜틀비틀, 왜뚤왜뚤,비틀비틀, 배틀배틀, 삐틀삐틀,빼틀빼틀, 비실비실, 배슬배슬(배실배실), 비칠비칠, 배칠배칠, 비슬비슬, 비쓸비쓸, 비치적비치적, 비트적비트적, 빼트작빼트작, 삐트적삐트적, 배치작배치작, 배트작배트작, 배착배착 (박일환, 『의성의태어의 발견』, 사람인, 2023, 37~4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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