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늙은이로되 입성만은 심상찮았다. 검은색 야구 모자에 짙은 밤색 콤비를 받쳐 입고 하늘색이 도는 운동화를 신은 품이 멋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였으나 슬쩍슬쩍 비치는 브랜드라는 게 웬만큼 들이지 않으면 쉬 갖지 못하는 고급 일색이었다. 점방 문을 열고 들어온 노인은 새초롬했다. 어울리는 친구들 거진 여기서 머리를 깎는대서 한번 와봤다는 일성에 깎새는 시금털털한 첫인상을 휴지통에 얼른 집어던지고 비굴한 미소로 노인 역시 친구들과 더불어 단골 손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고 획책했다. 불황인데다 비수기인 동절기로 접어드는 요즘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쉬운 법이니까. 노인은 커트와 염색을 묶어서 주문했다.
거의 받들어 모시듯 노인 비위를 맞춰 가던 중에 묻지도 않았는데 노인이 이 동네에 안 산다고 자백하듯 털어놓길래 의아했다. 아침 7시면 아파트 전용 셔틀버스를 잡아 타고 해운대 장산역에 내려 2호선에 오른다. 개금역에 도착해 깎새 점방에서 지척인 개금 배수지로 곧장 가 이미 나와서 운동 중인 친구들과 합류해 한두 시간 어울린다. 한 잔에 500원 하는 커피를 파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또 노닥거리다가 시장기 돌면 근처에서 점심을 사먹든가 다시 2호선을 타고 해운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과라고 노인은 밝혔다. 깎새 출퇴근 코스랑 똑같아서 해운대 어디쯤 사시느냐 물었더니 엎어지면 코 닿을 데더라구.
1970년대 외국 차관으로 지었다고 해서 AID아파트라고 불리던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허물고 초고층, 최신식 아파트를 새로 지어서 입주를 시작한 게 2015년 경이었다. 언덕(HILL) 위에 세워진 품격 높은 주거 단지(STATE)라는 거창한 뜻을 품은 영어 단어 조합이 어째 뜬구름 잡듯 허황된 느낌을 주는 아파트. 하여튼 노인은 2년 전에 거기로 거처를 옮겼단다. 해운대에서 한참 떨어진 개금에서 이웃사촌을 만나 무척 반갑다는 깎새 너스레가 통했는지 노인 입가에 미소가 슬쩍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구헌 날 개금을 찾는 까닭을 늘어놓자 분위기는 일순 숙연해졌다. 개금 토박이였던 노인이 얼마 안 떨어진 주례 LG아파트(유서 깊은 아파트라 부산사람들 사이에선 유명짜하다)로 이사를 간 게 7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더 멀리 떨어진 해운대로 거처를 옮겼는데도 개금 배수지만은 하루도 안 거르고 다녔단다. 낯선 데서 낯선 사람들과 선뜻 어울리지 못하는 기질 탓일 테지만 여기 개금만큼 마음 편한 데가 달리 없다고 덧붙이면서. 헌데 깎새 귀에는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다는 말로 들려 짠해졌다. 사시는 해운대 아파트는 주거환경서껀 편의시설 좋기로 소문이 짝자그르한데 거기서 유유자적하게 즐길 수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노인은 살기 편하기로야 그만한 데가 또 없다면서 언덕 위 고품격 아파트 홍보대사인 양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그럴수록 현타가 오는지 뒤로 갈수록 말끝이 흐려졌다. 화려한 배경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헐벗고 침울한 실존.
그래도 지금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변변한 이웃사촌 하나 사귀지 못한 깎새보다 노인이 낫다. 외향적인데다 사교적이기까지 한 마누라가 아파트 아줌마들로 새로운 지란지교 라인업을 진작에 구축한 데 비해 깎새는 대인기피증까지는 아니지만 쉽사리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는 이들과 없는 걸 있는 척하면서 어울리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뻗대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어영부영하다 20년이 쏜살같이 흘러 동네 빈대떡 점방에나 가끔 가 혼술을 즐기는 걸 낙이랍시고 여기는 행상머리가 딱히 슬기로운 동네생활은 아니다.
그러니 재차 강조하건대 노인이 깎새보다 낫다. 사는 동네에서야 마음 두지 못해 적적할지 몰라도 전철 타는 수고만 좀 들이면 한나절 함께 즐길 벗들은 건재하니 동네나 점방이나 늘 외톨이일 수밖에 없는 깎새보다야 인생을 훨씬 즐겁게 사는 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