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부부

by 김대일

단골 중에 꼭 아내를 대동하고 머리 깎으러 오는 사내가 있다. 깎새와 비슷한 연배인 성싶은 사내는 남들이 보기에 거북살스러울 만큼 자기 아내한테 우악살스럽게 군다. 남들이 보건 말건 윽박지른다거나 종 다루듯 험하게 대하는 꼴은 볼썽사나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아내였다. 온갖 구박과 수모를 당해도 약점을 단단히 잡힌 사람처럼 꼼짝을 못하는 모습은 안쓰러울 지경인데 정작 본인은 그런가 부다 하고 태연스럽다. 남편이 저렇듯 강포한 데는 자기 탓이 크다는 원초적 죄책감이랄지 아무리 어렵고 고생스럽더라도 팔자소관이려니 하는 체념이랄지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감정이 복잡미묘하게 그늘져 있는 얼굴을 다달이 봐야 하는 건 고역이다. 하여 그 부부가 점방에 나타나면 깎새는 영 마뜩잖다.

혹시 아내가 바람을 피다가 남편한테 딱 걸리는 바람에 코가 꿰인 게 아닐까. 이혼 귀책사유가 자기한테 있는데다 남편이란 작자가 워낙 간교한 기질인지라 이혼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해 대신 굴종을 택한 건 아닐까. 남편은 그런 아내를 예속해 학대를 일삼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저지르고 있는 거고. 문제적 부부가 나타날 적마다 깎새는 덩달아 숨겨놨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전에 써 둔 소설에 새 살을 또 덧붙이고 자빠졌던 게다.

그런데, 머리를 다 깎은 남편이 샴푸를 하려고 세면장으로 가면 대기석에 남아 기다리는 아내의 동태를 앞거울로 흘낏흘낏 살피곤 하던 깎새가 흔치 않지만 아주 가끔, 그것도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 그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냉소를 포착하고서는 섬뜩해한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굴욕을 견디는 건 오로지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기 위해서라는 듯이.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가 쓴 『​속담 인류학』(한승동 옮김, 하늘산책, 2012)에는 버나드 쇼가 말했다는 명언이 있다.​


​ 남자는 교활하다. 여자의 첫 남자인 듯이 군다. 하지만 여자는 더 교활하다. 남자의 마지막 여자인 듯이 군다.


​ 요네하라 마리는 기득권 논리에 비중을 두고 버나드 쇼 명언을 해석하려 든다. 즉, 남자의 교활함이란 결국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라는 선취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버나드 쇼 명언은 뒷부분에 방점을 찍어야 마땅하다. 뛰는 남자 위에 나는 여자야말로 선취권을 획득한 남자 등에 빨대를 꽂아 마지막 순정까지 쪽쪽 다 빨아먹는 팜므파탈이니까.

남편은 자기 아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득의만만해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만시켜 남편이란 멍청이를 얌전하게 다루려고 획책한 아내의 계락이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이 기조를 유지해 얻을 득이 실보다 많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남편보다 아내가 더 영악하고 음험한 사람일지 모른다. 버나드 쇼 명언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본다. 부처님(아내) 손바닥 안 손오공(남편). 여자의 교활함은 더 치명적이다.

깎새의 상상력은 어디가 끝일까. 손님이 어지간히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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