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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02. 2023

nunc est bibendum!

   옛 배경까지 다 늘어놓자면 얘기가 한참 길어질 테고 내용이 딱히 실한 알맹이도 아니어서 거두절미하겠다. 다만 어떤 계기로 촉발된 느낌이 상념의 꼬리를 붙들고 마구 흔들어서 몇 자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에서 안 사람(여자)이 한 친구를 통해 업무 관계로 부산에 8개월 가량 체류할 예정인 바 부산 사는 동아리 동기들과 만나 회포나 풀었음 한다는 제의를 했다. 그 사람과 통화한 친구는 내게 어찌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사람과 썩 좋은 추억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더러 재회한들 해묵은 그 감정 때문에 적조한 사이가 일거에 불식될지도 의문이 들어서였다. 다 차치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그 사람을 대해야 할지 자신이 전혀 없는 나를 드러내기 싫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 쉽게 말을 트지 않는다. 말을 튼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또 한 사람의 타인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온다는 의미고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고종석)는 어쩌면 지금 내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폐쇄적이진 않았다. 수더분하진 않아도 어우렁더우렁 지내기엔 무리가 없던 청년기를 보냈다고 증언할 이들이 꽤 되는 걸 보면 녹록지 않았던 그간의 역정歷程​이 사람을 극적으로 변질시킨 후천적 요인으로 크게 작용한 성싶다.

   내남없이 참견하길 좋아하는 걸 두고 흔히들 '오지랖이 넓다'라며 빈정거리곤 하지만 살면서 멍이 지고 생채기가 난 팔자를 그냥 두고는 못 봐줘 내 처지인 양 요란을 떠는 속정 깊은 오지랖은 그 자체가 배려의 화신이다. 그러니 외톨이로 곪느니 오지랖이라는 수혜라도 기대하려면 외곬의 해자를 허물고 최소한의 교감이나마 구축해야 하건만 세월의 더께는 퀴퀴한 고립의 철옹성을 더욱 공고히 해 스스로를 감금시켜 버린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인색하고 마는 볼썽사나운 완고의 이면이라며 개소리괴소리로 뻗대지만 실은 번거로운 시행착오를 지레 염려한, 남 손 탄 길로만 어슬렁거리려는 단작스런 보신주의, 타인에게 행여 나약한 심지라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옹졸함을 부러 은폐하려는 수작이 아니고 뭘까. 대인기피증이라 쓰고 새로움울렁증이라고 씨불이는 채신머리가 이대로 고질로 굳어져 교정이 어려워질지언정 익숙한 관계망까지 사후 약방문은 곤란하다. 

   한눈 파는 일이 절대 없는 세월이 어김없이 올해의 끝을 향해 질주 중이고 어느덧 세밑이 코앞이라 싱숭생숭한 요즘, 그저 그 사람의 제의를 전했을 뿐인 친구가 무안할 만큼 단칼에 거절한 처사가 과연 적절했는지 생각만 많아진다.

   '이제 마실 시간이다! nunc est bibendum!'

   이렇게 외칠 오랜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변명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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