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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금호 Feb 08. 2021

놓칠수 없는 독일 근로자의 혜택

한국/미국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어렵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장벽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는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에린 브로코비치"이다. 한국에서 바쁜 삶을 살고 있던 시절, 간혹 지치거나 상처를 받았을때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재충전을 하고 기운을 냈던 경우가 많았다. (사업을 하던 시절에는 힘들때 대부 시리즈를 많이 봤었다 ㅎㅎ) 영화 중간에 중요한 업무를 맡게된 주인공이 사장에게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는데, 고심하던 사장은 10% 급여 인상과 함께 "No Benefits"라고 단호히 말한다. 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의료 보험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겠지만,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며 세아이를 홀로 키우던 주인공 입장에서는 우선은 10% 급여 인상이라도 감지덕지 였을것이다.

"No Benefits" from Erin Brockovich (2000) :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에 한명인 앨버트 피니(Albert Finney)


작년에 독일 영주권을 취득한 이후에는 굳이 독일 회사에서 계속 근무할 필요 없이 원한다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한국 회사이든 어디든 이직할 수 있게 되었다. 다니고 있는 독일 회사나 동료들에 대해서 딱히 불만이 없지만, 틈틈이 구인 공고를 보면서 괜찮은 회사들의 포지션이 오픈되었으면 지원을 해보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들도 예전과는 달리, 높은 레벨의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회사들이 많아진 것 같고 경력이 많은 시니어 엔지니어의 위상 역시 조금 달라진 것을 느낀다. 물론 대부분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몇몇 회사들과 인터뷰나 코딩 챌린지를 하고 계약 협상을 벌였고, 그 중에 일부 회사들로부터는 괜찮은 조건의 계약서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싸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대부분 내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주는 것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아마도 내가 계속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 주저 없이 싸인을 했을테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나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독일에 살면서, 독일 회사에 다님으로써 얻는 유무형의 "혜택(Benefits)"이었다. 그동안은 사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에, 이것이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장벽은 의외로 견고하고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다.


무엇이 나의 이직을 방해하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1. 업무 스타일

확실히 독일 회사는 한국/미국 회사와는 업무 스타일이 다르다. 업무 강도가 낮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다고 해야할까. 일반적으로 애자일/스크럼으로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 아무래도 개발자들의 업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무엇을 어느 정도 일을 했는지 누구나 쉽게 알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업무 방식은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개발자들의 노동 강도가 높아지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닝/스탠드업 미팅/레트로로 진행되는 2주 간격의 스프린트는 상당히 "인간적"으로 진행되며, 업무 시간 이외의 추가 근무를 요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휴가 기간과 휴일을 제외한 근무 시간 내에 작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장시간의 기술 검토나 새로운 개발이 필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준다. 따라서, 사전에 협의하여 추가된 티켓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또는 선택한) 티켓들만 제대로 처리를 하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일하기가 편하다. 특히 리더들이나 PM, PO들이 원하는 기능에 대해서 사전에 명확하게 요구사항을 정의하고 문서화를 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되거나 말도 안되는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최소화된다. 한국/미국 회사의 개발팀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합류하게 되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어떤 이슈들로 스트레스를 받게될지 명확하게 이해가 되다보니 아무래도 독일 회사에서의 업무 스타일과 비교가 안될수가 없다.


2. 휴가와 병가

무엇보다 큰 차이는 병가와는 별도인 1년에 30일이 보장된 유급 휴가이다. 일단 한국에서 나름 복지가 좋다고 큰소리를 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수준의 휴가를 맞춰주기는 쉽지 않다. 물론 일부는 휴가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수 있는 회사들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명확하게 "1년에 30일"이라고 정해져 있는 편이 훨씬 편하다. 쓸수 있는 휴가일수에 맞춰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휴가 계획을 치밀하게 잡을 수 있고, 휴가를 쓰는 것은 일이 바쁘던 아니던 제품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던지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쓸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서는 회사 일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휴가이다)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 내 경우, 가족들과 한국에 다녀오기 위해 한번에 4주 휴가를 사용한 적도 있었고, 대부분의 동료들은 한번에 2주 정도 휴가를 사용하는 편이다. 상사가 휴가를 승인해줄때 "반드시 연락이 되어야 하고, 필요하면 원격으로 업무를 해야한다는 조건"을 달지 않는 것도 좋고, 컨디션이 안좋은 날에는 병가를 내고 푹 쉰다고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 또한 더할나위 없이 좋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에는 솔직히 휴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지만, 이미 독일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나니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3. 고용 안정

6개월의 프로베짜이트(수습기간)이 끝나면, 퇴사이든 해고이든 정해진 통지 기간(notice period)을 지켜야 한다. 즉, 회사가 당신을 당장 해고하고 싶어도 해고 통지후 2~3개월 동안은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이것은 독일 회사나 독일인 사장이 착해서가 아니라 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 회사들은 확실히 한국/미국 회사들보다 직원 채용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 (최소 4주 이상) 또한, 입사할 때 회사와 계약하는 계약서에는 67세까지의 근로를 보장한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스타트업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이러한 문구가 들어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새삼 독일 정부의 근로자 고용 정책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독일 정부는 독일 회사들이 근로자의 고용을 유지시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정책을 수립하여 집행한다. 이 이야기는 코로나와 같이 예측하기 힘든 전세계적인 위기가 닥쳐도, 모든 회사들이 근로자들의 고용을 유지하도록 "정부의 재정 건전성"보다 우선하여 직간접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근로자의 근무시간을 줄여서라도 고용을 유지하면 원래 임금의 80% 수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단축 근무(Kurz Arbeit)를 시행했다. 물론, 어쩔수 없이 직장을 잃으면 실업수당(원래 급여의 60~67% 수준, 최대 1년)을 받을수 있고 그 이후에도 실직이 계속되면 구직 활동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실업수당II가 기간 제한 없이 제공된다. (15세 자녀를 가진 부부에게 약 150만원 + 집세/난방비 등) 이 정도면 "혜택(Benefits)"이 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는가.


4. 독일 연금

나는 한국에서 이미 20년 넘게 국민연금을 낸 사람이고 독일 영주권도 취득했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국민연금을 일시불로 수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한국의 국민연금과 독일 연금을 합쳐서 독일에서 연금을 받을 수도 있다. 일시불 수령 금액을 국민연금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확실히 내가 낸 금액(50%)만 일시불로 돌려받는 것보다는 전체 금액을 독일 연금에 합쳐서 받는 것이 이익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연금 재정 문제가 있어서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를 먹여살려야 하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전세계에서 독일로 와서 일을 하고 세금이나 연금을 기꺼이 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갈수록 대책없이 인구가 줄고 있는 한국보다는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또한, EU에서 산다는 것은 같은 연금을 가지고 훨씬 물가가 저렴한 국가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독일이 저렴한 물가를 계속 유지하는 방법이나 고급 노동자를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고용할 수 있는 것 또한 독일이 상대적으로 인건비와 물가가 낮은 국가들이 많이 있는 EU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농담삼아 이야기하지만, 어디서든 독일에서 마주치는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보인다. 같은 연금이라도 노인 빈곤율이 40%인 한국보다 10%인 독일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5. 킨더 겔트

2021년도에도 킨더 겔트(자녀 수당)이 인상되어 14세, 19세 아이들에게 매월 60만원 이상이 들어온다. 이렇게 자녀 수당이 직접 통장으로 매월 들어오니 큰 도움이 되며, 독일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도 전혀 아깝지 않게 생각된다. 작년 가을에는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 1명당 40만원씩 추가로 지급된 적이 있고 이번에도 1명당 20만원씩 추가로 지급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혜택을 받으려면 반드시 독일에서 세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한국/미국 회사로의 이직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게다가 내가 독일에서 벌어들이는 실소득이 한국/미국 회사에서 제안하는 금액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면 굳이 이직의 필요를 느낄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6. 개인 시간과 개인 프로젝트

한국에서는 꿈만 꾸면서 15~20년 이상을 기획만 하던 게임들을 독일에 와서는 개인 시간에 개인 프로젝트로 하나씩 착착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 독일에 와서 구직 활동을 하면서 20년전에 기획했던 게임을 한달만에 완성을 했었고, 작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거의 1년 동안 재택 근무를 하면서 여유시간이 더 생기게 되었고 휴가때도 아무데도 못가다보니 그 시간을 활용하여, 고등학교때부터 기획했던 게임을 만들수 있었다. 지금은 15년전에 기획했던 게임을 개발 중인데, 아래의 항공기들은 몇개월에 걸쳐서 저녁 시간, 주말, 휴가 때에 직접 그린 것들이다. 적게는 3~4시간, 많으면 몇십시간을 항공기 하나를 그리는데 투자해야 한다. 물론 자료 조사를 하고 괜찮은 레퍼런스들을 찾는 시간은 별도. 한국에서 20년 넘게 일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그 시간들을 쪼개서 책을 쓴다던지 강의를 한다던지 하면서 여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다.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나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결과물들이 회사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여기가 아니면 힘들것이다. 누구보다 내가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미국 회사로의 이직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개인 프로젝트가 너무나 많다.


최근에 받은 오퍼는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계약서를 일주일간 검토하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내게는 새로운 도전을 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만들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는데, 이 결정이 나 자신조차 놀라운 일이라 도대체 왜 그렇게 결정을 내렸는지 곰곰이 고민을 해보면서 이 글을 쓴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할만한 한국/미국 회사를 찾아볼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혜택들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오퍼이어야만 할테니 쉽지는 않을 것이다. ㅎㅎ


대신, 코로나 때문에 전직원의 급여를 동결한 회사와 협상을 해서 7.5%의 인상을 받아내었다. 휴가 일수도 2일 더 늘리려 했으나, 회사 내에서 30일을 초과하는 임직원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포기했지만.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독일 회사 근로자로서의 "워라벨"과 독일 정부의 강력한 "복지 정책"은 좋은 조건의 오퍼도 이겨낼만큼 엄청난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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