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 마멜룩 기병대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무혈입성합니다. 여기까지가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벌인 작전의 클라이맥스였지요. 그 이후로는 (물론 더 큰 승리도 꽤 많았지만) 일이 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물론 아시다시피 8월 1~2일에 벌어진 아부키르(Aboukir) 해전 (영국에서는 나일 해전이라고 부릅니다)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편에서 설명드렸듯이, 넬슨의 영국 해군 함대는 나폴레옹의 함대를 쫓아 지중해를 헤매고 다녔지만, 아슬아슬하게 그를 놓쳤지요. 결국 넬슨이 나폴레옹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7월 28일, 그것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 끝의 코로니(Koroni)에서였습니다. 넬슨은 단숨에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갑니다. 마침내 영국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8월 1일 정오가 넘어서였습니다. 넬슨은 두달 넘게 지중해를 떠돌며 헛수고를 했던 분노를 폭발시켜 프랑스 해군 함대를 그 자리에서 씹어먹을 태세였습니다.
(저 폭발은 그동안 고생했던 넬슨과 휘하 수병들의 분노에 비하면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영국 해군이 목격한 것은 당당한 프랑스 해군 전함들의 모습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수송선들의 무리였습니다. 하긴 나폴레옹은 이미 한달 전에 도착하여 사막에서의 모험과 고생을 겪은 뒤 역사에 남을 전투를 벌이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마멜룩 베이들의 저택에서 푹 쉬고 있을 때였으니, 그때까지 프랑스 해군 전함들이 '날 잡아 잡수'하고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넬슨은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100문짜리 1급 전함들은 커녕 74문짜리 3급 전함이 기항하기에도 수심이 너무 얕은 곳이었으므로, 여기에서 프랑스 전함들이 닻을 내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수송선들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은, 프랑스 함대도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처에 대형 전함들이 정박할 곳은 틀림없이 아부키르(Aboukir) 항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프랑스 해군이 거기서 영국 함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 이미 병력을 상륙시켰으니, 본국으로 되돌아가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영국 함대는 아부키르로 향합니다. 마침내 1시간 정도가 지난 뒤, 74문짜리 3급 전함인 HMS Zealous 호가 아부키르 만에 정박한 프랑스 전함들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올립니다. 물론 넬슨은 '드디어 !' 하며 기뻐했지요. 대체 프랑스 해군은 무슨 생각으로 한달 넘게 이집트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 혹시 그들도 영국 해군과 싸워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영국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
(이렇게 될 걸 프랑스 함대는 몰랐던 것일까요 ?)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당연히) 영국 해군을 매우 꺼려했습니다. 7월 초에 프랑스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거센 바람을 무릅쓰고 허겁지겁 병력을 내려 놓은 것도 영국 함대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상륙이 한창일 때, 아직 나폴레옹은 하선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평선에 낯선 돛 하나가 나타나자 프랑스인들은 모두 '영국놈들이다' 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폴레옹조차도 '아, 운명이여, 나를 이렇게 버리는가 !' 하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배는 영국 군함이 아니라 그냥 민간 상선일 뿐이었지요. 프랑스 함대의 최고 사령관이던 브뤼예 (Francois-Paul Brueys d'Aigalliers) 제독도, 지중해 항해 내내, 프랑스 함대의 질적 저하 문제 때문에 영국 함대와 마주치기만 하면 상황이 매우 불리할 것이라고 불안감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은 모두 영국 해군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함대의 상태가 어땠길래 이토록 영국 해군을 두려워했을까요 ? 알고 보면 전혀 꿇릴 만한 전력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만 13척에 프리깃함 4척을 가진 것에 비해, 그 뒤를 쫓는 영국 함대도 전열함 13척에 4급함 1척 (프리깃이라 하긴엔 좀 크고, 전열함이라 하기엔 좀 작은 50문짜리 HMS Leander 호), 그리고 프리깃보다도 작은 돛대 2개짜리의 슬룹(sloop) 1척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질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압도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전열함들은 모두 74문짜리 3급함인데 비해, 프랑스 함대의 전열함 중에는 120문짜리 1급함 오리앙(Orient)을 비롯하여 프랭클린(Franklin), 토낭(Tonnant), 귈롬 텔(Guillaume Tell)의 3척이 80문짜리 전함이었던 것입니다. 양측 전열함들의 포문 수를 합해보면 영국 함대는 총 962문인 것에 비해, 프랑스 함대는 총 1,026문으로 프랑스 함대가 근소하게 우세했습니다. 특히 당시 해전에서는 대포 수보다 더 중요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병력 수에서도 프랑스가 영국측을 압도했습니다. 4급 이하의 함정들을 합해도 프랑스 측이 더 유리했지요. 게다가 당시 프랑스의 조선 기술은 영국보다 훨씬 우월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내내, 영국 해군 전함 중 가장 항행성이 좋았던 '착한 전함'들은 대개가 영국 조선소에서 진수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건조되었다가 해전을 통해 영국 측에 나포되어 영국 해군에 편입된 전함들이었지요.
그렇다면 대체 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을 두려워 했을까요 ? 바로 훈련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 및 스페인 항구들을 봉쇄하느라 거의 전 함정이 상시 작전 중이었던 것에 비해, 프랑스 해군은 대부분 항구에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뜻하는 바는 영국 해군은 끊임없는 훈련을, 프랑스 해군은 기술력 부족과 사기 저하에 시달려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범선이라는 것은 굉장히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의 기계로서, 배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함장이 바람과 파도, 별과 해도를 잘 읽고, 수많은 수병들이 돛줄을 일사불란하게 당기고, 조타장이 키를 적절하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책으로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서, 배가 정확하게 함장의 뜻대로 움직이려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경험을 쌓아야 했습니다. 요즘처럼 수만 마력짜리 엔진과 스크루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바람을 이용하여 전진할 뿐만 하니라 방향도 조절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가령 범선의 방향을 180도 회전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기술 중의 하나로서, 모든 배가 이 동작을 항상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작을 취할 때의 영어 명령은 그저 'Bring the ship about !' 으로서 평범했던 것에 비해, 프랑스어 명령은 매우 의미심장했습니다. 'A-Dieu-va !" 해석하면 '신의 뜻대로 !' 정도지요. 워낙 어려운 동작이라서, '일단 시도는 해보겠는데 성공 여부는 하늘이 결정할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프랑스인들의 항행 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은 저 A-Dieu-va 이야기는 Patrick O'Brian의 The Letter of Marque 편에 인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사실일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패트릭 할배의 내공은 대단하거든요.)
특히, 이렇게 십여 척의 전함들이 그룹을 이루어 싸울 때는 뭔가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한 국가의 역량이 결집되어야 나올 수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가르쳐주는 곳도 없지만) 책이나 학교에서 배울 수도 없고, 수많은 수병들과 장교들, 함장들, 그리고 제독들이 많은 해전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쌓았을 때야 나올 수 있는 것이거든요. 프랑스군이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바로 이 분야였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원래부터 그렇게 질이 떨어지는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때만 하더라도, 영국 해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많이 안겨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고급 장교들이 귀족 출신이었던 프랑스 해군에게, 프랑스 대혁명은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습니다. 많은 귀족 장교들이 망명을 택하거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하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요. 그와 함께, 지난 수십년, 간접적으로는 수백년간 쌓여 왔던 해전에 대한 경험과 기술도 대부분 소실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부키르 해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원하게 댕겅댕겅 잘라내버리면 그 동안의 화풀이야 하겠지만, 그동안 축적된 많은 지식과 경험도 함께 날아가버리지요.)
자,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렇다면 대체 왜 프랑스 해군은 병력 상륙이라는 임무도 완성한 마당에 재빨리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이집트 해역에서 한달 넘게 얼쩡거리고 있었을까요 ? 이것이 사실 상당한 미스터리입니다. 생각해보면 브뤼예는 자신 혼자의 결정으로 함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고, 원정군 총사령관인 나폴레옹의 지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혹시 아부키르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나폴레옹이 내렸던 것은 아닐까요 ?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나폴레옹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전적으로 브뤼예 제독의 판단 미스였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자신은 브뤼예에게 지시를 내리기를, '만약 알렉산드리아 항구 내에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그게 안된다면 아부키르 만에서 대기하거나, 그도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프랑스 해군 기지가 있는 그리스 서해안의 코르푸(Corfu) 섬으로 가라' 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름대로 적절한 지시처럼 보입니다. 당시 해군 함정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함 미주리나 야마토와 같은 거포가 장착되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강력한 포대로 보호된 적의 항구로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적절한 포대를 설치하고 전함들을 거기에 수용할 수 있었다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알렉산드리아는 너무 수심이 낮아, 전체 프랑스 함대를 수용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부키르 만으로 이동했던 것인데, 사실 아부키르는 항구라고 부르기에 상당히 부적절한 곳이었습니다. 여기는 원래 작은 어촌 마을로서, 큰 배들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도 없었고 강력한 포대를 설치할 공간도 부족했으며, 만 입구가 크게 노출되어 파도나 적의 전함들로부터 아군 함대를 적절히 보호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현재의 아부키르 만 위성 사진입니다. 저렇게 입구가 활짝 열린 곳은, 파도도 제대로 막을 수가 없으므로 제대로 된 항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굳이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 만에 남아 있어야 했을까요 ? 특히 이상했던 것은 원정 당시 프랑스 원정군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툴롱(Toulon) 항구 사령관 방스(Vence) 제독의 증언입니다. 그는 아부키르 만 참패 소식을 듣고는, 해군성 장관에게 "참으로 이상하다. 브뤼예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을 회상해보면, 그는 원정군을 내려놓기만 하면 24시간 안에 이집트에서 빠져 나올 작정이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브뤼예에게 함대를 이집트 해역에서 대기시키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설명은 다릅니다. 나폴레옹은 7월 25일 경, 브뤼예가 보낸 장계(7월 15일자)에서 아부키르 만에서 방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이 '이상한 결정'에 놀라, 즉각 줄리앙이라는 연락 장교를 보내 당장 코르푸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훗날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쓰며)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락 장교가 당시 사막에 횡행하던 베두인족들에게 걸려 살해되는 바람에 그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아부키르 만에서 어정쩡한 위치를 고수했던 것은 브뤼예 본인의 잘못 같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뭔가 잘못이 있었을 때 항상 그걸 남에게, 특히 변명할 기회가 없는 죽은 사람에게 떠넘기기를 잘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과연 브뤼예가 자발적으로 아부키르 만에 닻을 내렸을지 의심스럽긴 합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브뤼예는 함대를 아부키르 만에 정박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생각없는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브뤼예는 영국 해군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 함대의 실력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지는 않을 방어진을 구성할 수 있었지요. 브뤼예는 나름 최선을 다해 영국 함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자, 여러분이 브뤼예 제독이고, 자기 함대의 실력이 영국 함대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아는데, 아부키르 만에서 도망을 칠 상황도 못된다고 하면, 어떤 방어책을 강구하시겠습니까 ?
(여기서 잠깐, 건배 !)
여기서 잠깐, 전에 소개드린 바 있는, 영국 해군 장교들의 전통적인 요일별 건배 구호 중 금요일의 구호를 다시 되짚어 보지요. 바로 "A willing foe and sea room" 이었습니다. 즉 당시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처럼, 항구에 쳐박혀 있거나 만나기만 하면 도망치려는 적 말고, 정말 맞짱을 뜨겠다고 덤벼드는 적함을 영국 해군은 간절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전공을 세워서 나포 포상금도 받고 승진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sea room은 뭔가요 ? 글자 그대로 넉넉한 공간이 있는 바다, 탁 트인 바다를 뜻합니다. 왜 영국 해군은 싸우려는 적함과 함께 탁 트인 바다를 원했을까요 ? 바로 영국 해군의 장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라고 수병들 발에 물갈퀴가 달려 있거나, 선체가 강철로 되어 있거나, 대포알이 우라늄 탄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조선 기술은 오히려 프랑스보다 더 열악했습니다. 그런데도 영국 해군은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교들과 수병들의 seamanship, 즉 군함을 모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주력 전함들이 대개 74문짜리 3급함이었던 이유도, 100문이 넘는 대포를 장착한 1급함에 비해 화력이나 방호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바람과 파도를 타는 능력, 속도 등 항행 능력에 있어서 74문짜리 3급함이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화력보다 항행 능력이 더 중요했던 것은 당시 군함들의 구조 및 무장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의 근간을 이루었던 74문짜리 3급함의 모형입니다)
당시의 범선들은 옆구리에 대부분의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판재도 가장 두꺼웠으므로, 상대적으로 선수나 선미 부분이 공격력이나 방어력이 가장 취약했습니다. 따라서, 만약 아군의 옆면(broadside)를 적의 선수 또는 선미에 들이댈 수 있다면, 아군은 마음껏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데 비해 적은 거의 반격을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지요. 특히 당시 사용되던 쇳덩어리 구형탄(roundshot)은, 적의 옆면에 명중할 경우 그 짧은 횡단면을 통과하며 두세명의 적군을 상하게 할 뿐이었지만, 만약 적의 선수나 선미에서 배의 길이 방향으로 쏘아진다면, 배의 긴 종단면을 가로 지르며 그 경로에 있는 수십명의 수병을 한 방에 쓸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적의 선수 또는 선미를 아군의 옆면으로 갈겨대는 전법을 raking fire (종사, 또는 글자그대로 긁어대기)라고 불렀고, 이것이 영국 해군이 가장 선호하는 전술이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18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는 바다의 왕자로서의 관록이 쌓이면서, 적 함대와 나란히 항해하면서 포격을 주고 받는 정공법보다는, 적의 함대 중간으로 수직으로 돌입하여 적함의 선수 또는 선미로 파고 들어서 이 raking fire를 퍼붓는 것을 그 장기로 삼았습니다.
(굳이 남의 함대의 종대 사이로 파고 드는 이유는 ? 바로 raking fire !!!!)
그런데 이런 raking fire를 퍼부을 위치에 가기 위해서는, 정말 잘 훈련된 수병들과 함께, 적절한 바람, 그리고 넓은 바다가 필요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적이 raking 위치에 오도록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따라서 마치 2차 세계대전 중의 전투기들이 서로 꼬리를 물기 위해 치열한 선회전(dogfighting)을 펼쳤듯이, 영국 함대도 자신들의 뛰어난 항행 능력을 이용하여 적절한 선회를 해대며 raking 위치를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좁은 바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고, 그래서 영국 해군 장교들이 금요일마다 건배 구호로 "A willing foe and sea room"을 외쳤던 것입니다.
(허영만 선생의 만화 'Beat'는 조폭을 배경으로 한 청춘물인데, 거기서도 이런 말이 나오지요.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고수도 좁은 방안에서 많은 적을 상대로 다구리를 당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싸움꾼도 영국 해군처럼 실력 발휘를 위해서는 몸을 날릴 공간이 필요한가봐요.)
브뤼예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합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없애버리면 될 것 아닌가 ? 바다의 왕자라는 영국 해군도, 좁은 바다에서 멈춰 선채 그저 툭탁툭탁 대포알만 서로 주고 받는다면 뭐 딱히 무서운 상대도 아니다라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쪽은 무적의 120문짜리 1급함 오리앙 호가 있었으므로 정적인 포격전에서는 오히려 영국 함대를 압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브뤼예는 13척의 프랑스 전열함들을 주욱 일렬로 늘어세워 해안가에 바짝 가까이 붙여 닻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육지에 바짝 붙어 있으면 적이 그 좁은 아부키르 만에서 무슨 쇼를 하건 상관하지 않고 화려한 해전이 아닌, 참혹하지만 정적인 포격전으로 상황을 끌고 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상의 라인 배틀을 구현하자는 것이었지요. 혹시라도 솜씨 좋은 영국 전함이 종대로 늘어선 프랑스 전함 사이에 코를 쳐박고 raking 위치를 차지할까봐, 브뤼예는 각 전함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붙여 놓도록 했고, 또 앞 전함의 선미 부분과 뒤 전함의 선수 부분을 굵은 케이블로 연결해놓도록 했습니다. 브뤼예는 더 나아가, 아부키르만 입구에 있는 아부키르 섬에 4문의 포와 1문의 박격포를 설치하여 적 함대를 제압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완벽한 방어 준비라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굳건한 일렬 방어진 앞에서는 영국 로열 네이비 놈들도 어쩔 수 없겠지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 비해 여러가지 면에서 크게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부족했던 점은 바로 그 지휘관, 즉 브뤼예 제독의 역량이었습니다. 먼저, 이 브뤼예라는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대프랑스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해군 작전의 책임을 맡은 최고 지휘관이었으니, 당연히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경험과 용기, 역량을 가진 뛰어난 장교였겠지요 ?
브뤼예는 그 긴 이름 Francois-Paul Brueys d'Aigalliers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귀족 출신의 해군 장교였습니다. 1753년 생으로, 아부키르 해전 당시에는 45세로서, 군인으로서는 한창 나이였지요. 이 양반은 13세 때 소년 자원병으로서 처음으로 군함에 올라탄 이후, 2년 만에 사관 후보생(Garde de la marine, 영국의 midshipman에 해당)이 되었고, 1777년 그러니까 24세라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야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해군과의 교전에 몇번 참전하기도 했었으나, 그때는 계급이 너무 낮아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787년까지 작은 연락선의 함장(그러니까 진짜 정규 함장, 즉 post captain은 아니었지요)을 맡는 정도로, 무척 눈에 띄지 않는 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해군에서 나이 34세에 작은 연락선의 함장이라고 하면, 거의 출세와는 거리를 쌓았다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러다가 약 1년간 장기 휴가를 받은 사이, 그만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습니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늦은 승진을 보면 짐작이 가지만 잘나가는 특권층 귀족은 아니었거든요) 망명하거나 혁명에 반기를 들거나 하지 않았고, 관록있는 다른 귀족 해군 장교들이 다 망명하거나 제거된 덕택에, 1792년 갑자기 함장 계급으로 승진하며 꿈에서나 상상하던 전열함 Toulon 호의 함장이 됩니다. 그는 이 전함을 지휘하여 나폴리 및 사르디니아의 '별로 안 중요한' 전쟁에서 육상 포격 등 '별로 극적이지 않은' 전투를 몇번 치루었는데, 그만 1년 만에 체포되어 함장 직위를 빼앗겨 버립니다. 왜냐고요 ? 1793년 툴롱 반란 사건에 걸려든 것이지요. 그는 1795년에야 다시 함장직을 되돌려 받고 해군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동해안인 아드리아 해에서 나폴레옹의 북부 이탈리아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의 눈에 띈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뭐 대단한 전공이 있었느냐고요 ? 물론 아니지요. 하지만 당시 프랑스 해군에서 전함을 몰고 실제로 바다를 누볐던 함장이 거의 없을 정도로 프랑스 해군은 침체 속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렇게 변변찮은 경력의 브뤼예가 그나마 가장 나은 경력을 가진 프랑스 해군 장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브뤼예는 프랑스 국내에서나 '그나마 좀 나은' 해군 지휘관이었고, 1~2년간 뭍에 올라올 기회가 없을 정도로 바다에서 뼈가 굵은 영국 해군의 수준에서 보면, 그야말로 미숙련 초급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브뤼예 자신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태우고 지중해를 가로지를 때도, 항상 영국 함대와 마주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고, 자신의 함대는 영국 함대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일찌감치 반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함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경력의 자신의 실력이 그러할진대, 수하의 부하 장교들이나 수병들의 자질과 경력도 '안봐도 비디오'라는 것이었지요.
그에 비해, 브뤼예가 상대해야 하는 넬슨의 경우를 보도록 하시지요. 넬슨은 브뤼예보다 5살 어린 1758년 생으로서, 귀족과는 거리가 좀 있는, 그냥 시골 목사의 6번째 자식이었습니다. 그도 13세 때 최초로 해군에 입대하여, 2등 수병으로 군함의 건빵 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막장 수병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고, 어머니 쪽 외삼촌인 서클링(Suckling) 함장의 후견을 받고 있었지요. 그는 이 외삼촌 덕택에 어릴 때부터 북극의 빙산부터 서인도 제도의 열대지방,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해군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17세 때 인도양에서 인도 해군과 최초의 전투를 경험하기도 했지요. 넬슨은 19살 때 임관 시험을 치렀는데, 3명의 시험관 중 1명이 바로 그 외삼촌 서클링 함장이었고, (그 덕택인지) 당연히 시험은 일사천리로 통과했으며, 통과한 바로 다음날 임관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메이카로 떠날 예정인 HMS Lowestoffe 호의 사관으로 임명되는 파격적 혜택을 받습니다. 임관 시험을 통과하고도 임관이 안된다든지, 또는 임관이 되었어도 보직을 받지 못해 육지에서 신세 타령만 하는 젊은 해군 장교들이 수두룩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이놈의 혈연 관계에 의한 특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가 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런 배경 덕택에 이후로도 빠른 승진을 거쳐, 39세인 1797년에는 이미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영국 해군의 고참 함장으로서 해군 소장 (Rear-Admiral of the Blue)으로 승진하기에 이릅니다.
(넬슨 모자의 저 브로치 같은 것은 아부키르 해전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내린 다이아몬드 장식물입니다.)
넬슨이 외삼촌 빽 덕택에 고속 승진한 너절한 해군 제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그가 참전했던 전투 중 하나인 1797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을 잠깐 보시지요. 당시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던 영국은 저비스 (Jervis) 제독의 지휘 하에 스페인 함대와 교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국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이 고작 15척이었던 것에 비해, 스페인측은 전열함만 무려 27척에 달할 정도로 스페인이 훨씬 우세한 전력이었습니다. 다만 스페인 함대는 크게 3그룹으로 야간 분산되어 있었지요. 그런데도 자신감 넘치는 영국 함대를 지휘하던 저비스 제독은 그 그룹 사이를 파고 들어 적 함대의 후미에 raking fire를 퍼붓기 위해 1열 종대로 되어 있던 함대의 전열을 한척씩 순차적으로 거의 180도로 선회시켰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영국 함대가 한척씩 꼬리를 물고 선회 운동을 하는 동안, 넬슨은 마침 전열 중 끝에서 3번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넬슨은 27대 15의 싸움에 자신감을 가지고 덤벼드는 저비스 제독을 무색케 할 자신감이 있었나 봅니다. 그는 선회 운동 도중 스페인 함대의 선두 쪽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영국 함대가 이런 식으로 선회하다가는 스페인 함대의 꼬리 부분은 잡을지 몰라도 선두의 적 기함인 Santísima Trinidad 호는 놓치게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Old Jarvy, 즉 저비스 제독의 명령을 개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책임 하에, 전체 함대 기동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함수를 틀어 적 함대 선두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를 향해 돌격했습니다. 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는 스페인 총사령관 코르도바(Cordova) 제독이 탑승한 기함답게, 당시 유럽 최대인 130문을 장착한 1급함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넬슨이 탄 HMS Captain호는 평범한 74문짜리 3급함이었지요.
(넬슨이 노렸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습니다.)
그 다음 상황이 영국 해군의 강점을 보여주는 것인데, 넬슨의 뒤를 따르던 두척의 전함도, 넬슨이 무엇을 노리는지 보고는, 그대로 넬슨을 따라 선회하여 적 함대의 선두를 노리고 돌격했습니다. 거의 그와 동시에, 저비스 제독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각 함정은 각자 판단에 따라 행동하라'는 신호깃발을 올립니다.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비록 노리던 130문짜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는 놓쳤지만, 넬슨은 역시 자신의 HMS Captain 호보다 훨씬 큰 84문짜리 San Nicolas 호에 돌격대를 이끌고 '영광의 승리 아니면 웨스트민스터 국립 묘지를 !' 이라는 구호와 함께 직접 뛰어들어 항복을 받아냈고, 이어 산 니콜라스 호를 지원하러 왔다가 산 니콜라스 호와 측면이 엉켜 붙어버린 112문짜리 1급함 San Jose 호까지 그대로 덮쳐 포획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둡니다. 당시 영국 언론은 이 놀라운 성과, 즉 74문짜리 한척이 84문과 112문짜리 전함 2척을 한꺼번에 나포한 사건을 가리켜, '넬슨이 특허낸 적함 돌격용 교량'이라고 극찬했습니다. 84문짜리 산 니콜라스 호는 112문짜리 산 호세 호를 덮치기 위한 다리에 불과했다는 칭찬이었지요. 넬슨의 대활약에 힘입어, 이날 영국 함대는 단 한척도 잃지 않은채 적 전함 4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산 니콜라스 호의 항복을 받아내는 넬슨. 이때만 해도 양팔이 다 무사했지요.)
이런 넬슨이 마침내 8월 1일, 브뤼예가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한 아부키르 만 앞바다에 나타납니다. 과연 넬슨은 브뤼예가 펼쳐 놓은 방어진에서 어떤 헛점을 볼 수 있었을까요 ? 그건 다음 기회에 보시도록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