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시리아 침공을 개시하여, 나름 고생을 하지만 그래도 전투에서는 승승장구하여 자파(Jaffa)까지 점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다만 그의 시리아 침공을 가로막을 운명의 3인을 아크레에서 만나게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3인은 과연 누구누구일까요 ?
먼저 제자르 파샤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시리아 침공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침공을 위해 소위 다마스쿠스(Damascus) 군을 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 다마스쿠스 군의 수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바로 제자르 (Jezzar, Cezzar, Djezzar) 파샤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많은 고위 관료가 그랬지만, 이 제자르 파샤라는 사람도 원래는 투르크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가 제자르 파샤의 고향입니다. 발칸 반도 보스니아의 스톨라치 Stolac 라는 마을입니다.)
원래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Bosnia) 산간 마을에서 아흐메드(Ahmed)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제자르 파샤는 젊을 때부터 성격이 과히 양순한 편이 못 되어, 살인을 저지르고 고향을 등졌습니다. 그는 당시 범죄자나 실직자들이 흔히 하듯이,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에 입대를 하여 법망을 일단 피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해군의 엄격한 생활도 몸에 맞지 않아 결국 탈영, 이스탄불에서 길거리를 헤메는 처지가 되었지요. 굶다 못한 아흐메드는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 이집트에 마멜룩으로 팔려갑니다. 이렇게 출세를 꿈꾸며 자식이나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가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이집트에서 아흐메드는 마멜룩 내부의 권력 싸움에 휘말려 있던 알리 (Ali) 베이의 부하로 들어가, 비로소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됩니다. 즉, 알리 베이의 정적들을 무참히 처단하는 일이었지요. 이때부터 그는 본명보다는 별명인 제자르(Jezzar, 도살자라는 뜻입니다)로 불리게 되었고, 자기 자신도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도 조금 낡긴 했지만, 유럽식 무장을 갖춘 군함들이 꽤 있었습니다. 오스만 해군에는 유럽식 근대 해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저에 구리 판금을 입힌 군함이 나폴레옹 당시에만 해도 약 40척 정도 있었습니다. 대개는 전열함이 아닌, 갈레온, 프리깃, 코르벳함이긴 했지만요.)
그러다가 주군인 알리 베이가 1773년 죽자, 그는 다른 마멜룩들의 보복을 피해 시리아로 튑니다. 거기서 그는 시리아 태수인 다르 알 오마르 (Dahr Al-Omar)의 부하로 들어간 뒤, 결국 주군을 배신하여 죽인 뒤, 그 자리를 차지하여 시돈과 아크레 등의 지역에 대한 지배자가 되지요. 이렇게 권력을 잡은 제자르는 오스만 중앙 정부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해, 많은 제후국 중에서는 드물게도 중앙 정부에 대한 조공을 제때에 꼬박꼬박 지불하는 착한 파샤가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못하여, 그는 여기서도 자기 별명에 걸맞는 행위로 명성을 떨칩니다. 가령 1780년대에 그를 방문했던 한 영국인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궁전에 있는 하인들 중 상당수가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엄벌을 받아, 어떤이는 귀가, 어떤이는 코가, 또 어떤이는 눈을, 발을, 또 팔을 잘린 하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자르 파샤의 잔인함은 여자도 봐주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메카 순례를 다녀온 뒤,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하여 자신의 하렘에 있는 와이프 7명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르 파샤는 시리아 내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고, 유럽인들 중에서도 특히 오스만 중앙 정부에 영향력이 꽤 있었던 프랑스인들을 매우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통치 기간 중,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잦았던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십자군 시대부터 내려오던 요새 항구인 아크레 항구의 방어 시설을 개보수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가 60대 후반 ~ 70대 초반 즈음 되었을 때,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이 일어났지요.
(제자르 파샤의 악행은 사실 그가 미워한 유럽인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르 파샤는 어쨌거나 관개 공사나 건축 사업을 통해 레반트 지역을 좀더 살만하고 볼만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작이 이 알-제자르 모스크로서, 1781년 완공된 이 아크레 시내의 모스크는 제자르 파샤가 기존 기독교 교회 위에 지은 것입니다. 제자르 파샤는 나중에 사후, 이곳 안뜰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침공을 위한 '다마스쿠스 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드디어 자신의 숙적인 프랑스인들에게, 자신의 하인들에게 한 것과 같은 형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나폴레옹을 붙잡아 그의 눈을 뽑고 혀를 자르면 무척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겠지요. 그러나 막상 나폴레옹이 먼저 시리아 침공을 개시하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습니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엘 아리쉬나 자파에서의 포위전이 지나치게 시간을 오래 잡아 먹는 졸전이었으나, 제자르 파샤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수가 많지도 않은 프랑스군이 거의 일사천리로 수많은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면서 시리아의 주요 요새들을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르 파샤는 그때문에 역시 주요 항구였던 하이파(Haifa)에서 수비 병력을 철수시켜 자신이 있는 아크레(Acre)로 모은 뒤, 나폴레옹이 하이파에 무혈 입성하자 아예 아크레에서도 싸우지 않고 물러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제자르 파샤에게, 왠 프랑스인 하나가 찾아옵니다. 어떤 대담한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이라면 찢어죽이고 싶어하는 제자르 파샤에게 홀몸으로 찾아온 것이었을까요 ? 이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에게 저항한 3인 중 2번째 인물이었고, 그 이름은 펠리포(Louis-Edmond Phelippeaux)였습니다.
(사실 아크레의 3인방에는 펠리포보다도, 다마스커스 출신의 유태인이자 제자르 파샤의 고문인 하임 파르키가 더 자격이 있습니다. 제자르 파샤가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파르키의 철통같은 방어 준비와 조언에 도움을 받은 것이 컸습니다. 다만 이 양반은 유럽인들에 의해 그냥 제자르 파샤의 하인 정도로 평가절하되었지요.)
펠리포는 나폴레옹과 10대 시절부터 아주 잘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그렇다고 친한 편이었냐 하면 그 정반대였었지요. 펠리포는 식민지 코르시카의 몰락한 귀족 나부랭이였던 나폴레옹과는 달리, 명문가의 정통 백작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는 한 책상을 쓰는 사이였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자존심과 프랑스에 대한 비뚤어진 감정 밖에 없었던 나폴레옹과는 당연히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곱게 자란 펠리포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나폴레옹 탓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수업 시간 중에 옆에 앉은 나폴레옹과 선생님 몰래 책상 밑으로 서로 다리를 걷어차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학교 성적은 나폴레옹보다 더 좋았습니다. 빨리 임관하여 돈을 벌려고 월반을 서둘렀던 나폴레옹은 58명 중에 48등인가로 간신히 졸업한 것에 그쳤거든요.
(나폴레옹과 펠리포이 서로에 대한 악연을 아름답게 쌓아갔던 프랑스 왕립 사관학교 Ecole Militaire 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인생은 확 바뀌게 됩니다. 출세를 보장해주었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 펠리포에게 도리어 굴레로 작용했던 것이지요. 그는 혁명 발발과 함께, 다른 수많은 귀족들처럼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처럼 피끓는 젊은이였던 그가, 옹색한 망명 귀족(emigre)의 신세에 만족할 리가 없었지요. 그는 1793년 방데(Vendee)에 상륙하여 피의 바람을 불러왔던 바로 그 망명 귀족군의 일원이었습니다.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참조) 그러나 전에 언급했다시피, 이 왕당파 반란군은 오슈(Hoche) 장군의 신속하고 과감한 작전에 의해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분쇄되었고, 그도 포로로 잡힙니다. 당시 망명 귀족이 프랑스 내에 들어와 반란에 가담했다가 잡히면 무조건 단두대형으로 보답받았습니다. 그러나 펠리포는 처형 바로 전날 밤에, 두명의 동료의 도움을 받아 탈출, 극적으로 영국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같은 해에, 나폴레옹은 혁명 초반의 코르시카에서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 툴롱 포위전에서 마침내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지요.
(퀴베롱 만에서 왕당파의 반란을 눈깜짝할 사이에 분쇄한 오슈 장군의 위엄)
1797년,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그 전설적인 전격전으로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펠리포도 그냥 영국 정부의 쥐꼬리만한 연금을 받아먹으며 찌그러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파리로 비밀리에 숨어들어와, 악명높은 탕플(Temple) 감옥에 들어있는 영국인 포로들을 구해냅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시드니 스미스 경 (Sir Sidney Smith)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드니 경이라는 괴짜 영국 해군 장교가 나폴레옹을 막아선 3번째 인물입니다.
176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 5살 더 많았던 시드니 경은 원래 해군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군함을 탔는데, 개인적인 용기와 집안 배경을 이용하여 19세에 함장이 되는 파격적인 출세의 길을 달렸습니다. 그도 펠리포처럼 직접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나폴레옹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그가 어떻게 젊은 나이에 Sir 라는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었는지부터 보지요.
(이 몸은 knight ! Sir 라고 불러다오 !)
미국 독립 전쟁 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함장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이후로는 시드니 경의 일진이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평화 시기에는 배경 좋은 고참 함장도 현역 보직을 맡기가 어려운데, 시드니 경의 경우 너무 젊다보니 계속 무보직 보수(half-pay)를 받으며 육지에서 빈둥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는 돈많은 젊은이가 흔히 하듯, 프랑스 여행을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 1790년 스웨덴과 러시아에 전쟁이 벌어지자,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스웨덴으로 갑니다.
그는 어린 포르투갈 선원 한명만 데리고 작은 보트를 타고 발틱해를 가로질러 스웨덴 군항에 입항합니다. 강적 러시아를 앞두고 사정이 급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Gustav III)는 해군의 나라 영국에서 온 그에게 스웨덴 해군 장교직을 제안하는데, 당시 스웨덴의 적국이던 러시아와의 관계에 신경쓰던 영국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제안을 덥썩 받아들입니다. 본국 해군성의 미움을 산 이 모험은 나름 성과를 거둡니다.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스웨덴 국왕을 구해낸 공로로, 스웨덴 기사 작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러시아 측에 가담했던 그와 비슷한 처지의 무보직 영국 해군 장교들도 꽤 많이 있었는데, 그 중 6명이 그만 전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덕택에 시드니 경은 '동료를 죽여 잘난 북쪽 나라 기사 작위를 받은 재수없는 놈' 정도로 찍혀 버립니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항상 '스웨덴 기사'로 부르며 비아냥거렸지요. 그래도 그는 항상 캡틴 스미스(Captain Smith) 대신 서 스미스 (Sir Sidney)로 불릴 것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국내 갈등을 외국과의 전쟁으로 풀어보려던 스웨덴 구스타프 3세의 책동으로 발발한 이 전쟁은 1788~1790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수많은 인명과 재산만을 희생시킨 뒤, 뾰족한 결말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보직을 구하지 못하자, 1792년에 이번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로 갑니다. 거기엔 자기 동생 스펜서 스미스(Spencer Smith)가 영국 대사관 직원으로 있었거든요. 그는 여기서 오스만 해군에 지원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셀림 3세로부터 호감을 삽니다. 그러다가 1793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자, 또 부리나케 쪽배 한 척을 사서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이번의 전쟁터는 다름아닌 툴롱 항구였고, 때는 1793년하고도 12월, 나폴레옹의 포병대가 툴롱 항구를 내려다보는 요충지 인 멀그레이브(Mulgrave) 보루를 공격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무보직 장교였으므로) 그냥 자원병의 자격으로 영국 해군에 합류했는데,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공격 앞에서, 그는 물론이고 후드 제독조차도 해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가 맡은 임무는 툴롱 항구가 함락되기 직전, 영국 해군이 철수한 뒤에도 맨 마지막까지 항구에 남아 군수 창고와, 끌고 가지 못하는 나머지 프랑스 군함에 불을 질러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라고 그에게 주어진 스페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변명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이유가 어쨌건 프랑스 군함 중 상당수가 파괴되지 않고 프랑스군에게 회수되었습니다. 콜링우드 제독과 넬슨 제독은 모두 이 결과를 떠벌이 '스웨덴 기사'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아! 이제 보니 저들 중 하나가 바로 시드니 스미스...)
비난이야 받았지만, 그의 손에 파괴된 프랑스 전함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으로 돌아온 후 드디어 1795년, 다이아몬드(HMS Diamond) 호라는 프리깃함의 함장을 맡게 됩니다. 그는 프리깃 소함대에 소속되어 프랑스 해안을 정탐하고 들쑤시며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좋은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지요. 그는 1796년 4월, 프랑스 항구 내로 야음을 틈타 보트들을 이끌고 프랑스 선박을 탈취하러 갔다가 (이런 걸 닻줄을 끊고 탈취해 온다고 해서 cutting out 원정이라고 하지요. 흔히 영국 해군이 하던 작전입니다) 그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적 항구에 정박한 군함에 야음을 틈타 몰래 롱보트를 저어 올라탄 후 닻줄을 끊고 몰고 나오는 것이 cutting out expedition입니다. 이런 원정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시드니 스미스의 경우는 배를 빼앗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바람이 불질 않아 배를 항구 밖으로 몰고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포로가 된 영국 해군 장교들은 비교적 괜찮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의 시드니 경에게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당시로서는 놀랍도록 서류 작업을 잘 해놓아서, 그가 1793년 툴롱에서 프랑스 해군 함정에 불을 질렀고, 또 당시 그는 현역 장교가 아니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전산망도 없던 시절치고는 대단한 일이었지요. 아무튼 이런 이유로 프랑스군은 그를 전쟁 포로가 아닌 해적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해적질에 대한 재판을 하겠다고 협박도 했으나, 일단은 사형수들을 가둬두는 악명높은 탕플(Temple) 감옥에 가둬두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가 그의 인생에 그리 좋은 전망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2년 동안이나 갇혀 있던 상태에서 그에게 뜻 밖의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는데, 그것이 바로 펠리포였습니다. 1798년 5월, 펠리포가 마치 죄수 이송을 하는 것처럼 꾸며 그를 빼낸 뒤, 그대로 항구로 달아나 어선을 타고 영국으로 탈출시켜 준 것입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토와네뜨가 갇혀 있던 탕플 감옥입니다. 시드니 경은 여기 2년간 갇혀 있을 때, 마침 이탈리아 정복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나폴레옹에게 선처를 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그 편지는 나폴레옹에게 도착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시드니 경은 그 편지를 똑똑히 기억했고 답장이 없던 나폴레옹에게 치졸한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자, 영국 해군성 내에서 갑자기 시드니 경의 주가가 급상승합니다. 그가 전에 술탄 셀림 3세의 총애를 받았던 사실이 갑자기 중요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동생이 이젠 이스탄불의 영국 대사가 되어 있었거든요. 이제 시드니 경은 80문짜리 전함 티그르 (HMS Tigre)호의 함장이 되어 이스탄불로 보내집니다. 동부 지중해, 즉 레반트(Levant,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등을 포함한 지역) 지역에서 프랑스를 막고 영국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지요. 물론 그의 배에는 펠리포도 함께 타고 있었지요. 그는 이스탄불에서 영국의 기대처럼 술탄 셀림 3세로부터 꽤 환대를 받습니다. 그는 (물론 형식적이었지만) 셀림 3세로부터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조직되는 모든 오스만 육해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나아가 그의 친구 펠리포도 오스만 육군 대령으로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원래 소속인 영국 해군 내에서는 인기가 영 꽝이었습니다. 일단 그는 동부 지중해의 영국 해군에 대한 관할권을 두고 넬슨과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넬슨의 입장으로서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입만 살아있는 떠벌이가 지휘권을 주장하니 정말 별꼴의 반쪽이었겠지요. 그리고 당시 아부키르 해전의 영웅 넬슨은 영국에서는 절대 영웅이었고, 해군 내에서는 거의 군신에 가까왔기 때문에, 넬슨의 미움을 받은 시드니 경은 해군 내에서 더욱 입지가 좁았습니다. 어쨌거나 넬슨은 부상도 입었겠다 특히 당시 나폴리에서 해밀턴 대사 부인 엠마와 불륜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1799년 3월, 정말 시드니 경이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는 영국 함대의 지휘권을 승계 받습니다.
(영국 해군의 재앙 엠마 해밀턴... 당시 사람들에 따르면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녀의 미모에 대한 찬사란 숨쉬는 공기처럼 꼭 필요한 것이었다' 등등 그녀가 된장녀였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런 평가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정말 예쁘긴 예쁘군요...)
그리고 나폴레옹이 가자와 자파를 연달아 점령하자, 시드니 경은 친구 펠리포를 테세우스(HMS Theseus) 호에 태워 먼저 아크레로 급파, 제자르 파샤가 아크레의 방비를 튼튼하게 하는 것을 돕게 합니다. 펠리포는 나폴레옹과 동일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아는 것은 펠리포도 다 알고 있는 것이었고, 특히 그는 요새 축성학은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낡은 아크레의 성벽을 둘러보고, 제자르 파샤에게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보강해야 좀더 튼튼한 수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낌없이 풀어놓습니다.
(이 사적 표지판에는 - 저도 작아서 안 보입니다만 - 당시 나폴레옹에 맞서서 위에서 언급한 유태인 파르키와 펠리포가 함께 쌓은 방벽이라고 나왔다네요.)
물론 시드니 경도 곧 영국 소함대를 이끌고 아크레로 와 합류합니다. 시드니 경은 아크레 항에 정박하는 즉시, 약 1만 5천의 주민들과 4천명의 오스만 수비군이 먹을 충분한 양의 식량과 함께, 수백명의 영국 해군 및 해병대로 이루어진 포병대 및 약 4천발의 포탄과 화약을 하역합니다. 물론 오스만 해군 군함 몇척도 아크레 항에 합류했고요. 이로써 제자르 파샤와 오스만 수비군의 사기는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라는 식으로 단숨에 역전됩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
(Royal Navy to the rescue !)
자, 이제 나폴레옹과 그의 꿈을 꺾을 운명의 3인이 모두 아크레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꿈이 꺾이기까지는 양쪽에서 수많은 희생이 치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