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원정 편에서, 여러분은 알렉산드리아 해변의 모래 언덕에서 멍청이 므누(Menou) 장군을 상대로 '파리로 돌아가면 썩어빠진 변호사들로 이루어진 총재 정부를 그냥 확 뒤집어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나폴레옹의 포부를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야심많은 장군이라고 항상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지요. 또 아무리 잘 나가던 장군이라고 하더라도, 실패하면 곧 반역죄로 처형되는 중대 범죄인 쿠데타를 마음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쿠데타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3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1. 야심에 찬 군인
2. 강력한 독재 권력으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
3. 정치에 신물이 나서 '누가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례요 ? 멀리 갈 것 있습니까 ?)
일단 1번 조건은 이미 충분히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군인의 신분을 뛰어넘는 정치 권력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이미 1796~1797년 북부 이탈리아 원정 때였습니다. 이때 그는 파리 정부의 지시나 승인 따위에 신경쓰지 않고, 몇몇 공화국 (트란스파다노 공화국 Transpadane Republic, 치살피나 공화국 Cispadane Republic)을 새로 만들기도 하고 또 공화국 하나 (베네치아 공화국 Venetian Republic)를 부수기도 했지요. 특히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을 폐위시키라는 총재 정부의 지시를, 그럴 경우 나폴리 왕국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정면으로 거부하고, 대신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진격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결국 1797년의 레오벤 평화 조약이나 캄포 포르미오 조약 등은 모두 총재 정부의 지시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폴레옹 혼자의 책임으로 맺은 조약들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로 인해 찾아온 평화에 대한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요.
이때 당시 나폴레옹은 정치 권력의 달콤한 매력에 쏙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 현지에서 나폴레옹은 파리 정부에서 파견나온 관원과 접견할 때, 이미 '내가 쥐고 있는 권력을 절대 놓지 않을 것' 이라든가 '파리 총재 정부가 내게서 지휘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큰 코 다칠 것' 이라는 등의 도를 넘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원정이 끝나고 막상 파리로 돌아오니, 국민들이야 환호했지만 총재들은 나폴레옹의 인기를 경계하여 나폴레옹에게 중요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조치는 나폴레옹을 격분하고 또 초조하게 만들었지요.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자기 덕택에 정권을 쥐고 또 자기 덕택에 유지하고 있던' 총재들에 대한 원망을 가득 안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미 프뤽티도르 (Fructidor) 친위 쿠데타의 경험으로부터 총재 정부의 권력은 언제든 총검 앞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처음 1번이 어렵지 2번째부터는 쉽다고, 총재 정부 자신이 당시 앞장서서 쿠데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프릭튀도르 쿠데타 이후에도 총재 정부는 툭하면 작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마음에 안드는 총재나 의원들을 정부에서 몰아냈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플로레알 (Floreal) 22일 사건, 프레리알(Prairial) 30일 사건 등이었습니다.
2번 조건, 즉 강력한 독재 권력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땠을까요 ? 세상에 독재를 사랑하고, 독재로부터 득을 보는 사람이 있나요 ? 예, 당연히 있습니다. 이건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원래 거친 곳이라서, 한정된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을 해야 하는데, 치열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그런 자원을 차지하는데 가장 편리한 제도가 바로 독재 권력이거든요. 세상에는 독재 정부가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국민 대다수가 그런 독재 정부를 인정하고 그 권력에 굴복하느냐 여부지요.
(몰랐는데 이 양반이 사회학 Sociology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창시자라고 하네요.)
여기서 잠깐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ès)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적어도 제 시절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나왔습니다) 유명한 인물입니다. 시에예스의 대표작은 바로 1789년 1월, 아직 프랑스 대혁명 발발 전에 소집된 삼부회에서 발표한 정치 팜플렛 "Qu'est-ce que le tiers-état?"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다음 3줄의 글이 당시 억압받던 제3계급의 심정을 제대로 대표했지요.
-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 전부이다.
- 제3계급은 여태까지 무엇이었는가 ? 아무것도 아니었다.
- 제3계급은 무엇이 될 것인가 ? 그 무언가가 될 것이다.
(께스크 세 ~... 고딩 불어 시간 때 저 단어 외우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휴...)
원래 이 양반은 몰락한 귀족 후손이었으나 지금은 가난한 평민이나 다름없는 집안 출신이었는데, 카톨릭 사제였습니다. 시에예스는 카톨릭 종단 안에서도 잘나가나는 귀족 출신 사제는 종단 내에서도 출세가 빠르고 쉬운 것을 보고 분노하고 절망했다고 합니다. 원래 이 양반은 젊은 시절부터 권력 욕심이 꽤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제1계급인 사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3부회가 소집될 때 제3계급 대표로서 참석하여 위와 같은 팜플렛을 냈던 것입니다. 이 팜플렛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사실 시에예스가 추구하던 것은 그냥 입헌 군주제 정도였지 과격한 혁명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혁명 이후 입법 회의에서, 시에예스는 (아마도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십일조의 폐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가 사람들의 눈 밖에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몸을 숙이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치하에서도 목숨의 보전에만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살았습니다. 이어서 세워진 총재 정부에서 조금씩 다시 명성과 세력을 회복하여, 그는 마침내 1799년 5월, 프릭튀도르 쿠데타에서 쫓겨난 르웰(Rewell)의 뒤를 이어 5인 총재 중 1인으로 취임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나라 개신교 목사님들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신도들의 의무 사항이기도 하지요. 이 만화의 유머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는 총재 정부와 그 권력 근간인 1795년 헌법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썩어빠지고 무능한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부르조아 권력 기관을 세우기 위해 외국 세력과 결탁할 생각도 하고, 프레리알(Prairial)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주베르(Barthelemy Catherine Joubert) 장군에게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799년 8월, 이탈리아 북부의 노비(Novi) 전투에서 주베르 장군이 러시아의 노장 수보로프 (Alexander Suvorov)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자 그 음모는 구체화되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지요.
(1799년 북부 이탈리아 노비 Novi 전투입니다. 이 전투 초기에 주베르 장군은 유격병들의 사격을 받고 즉사해버립니다. 프랑스군과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공화국 병사들은 나름 열심히 싸워보았으나, 수보로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 군에게 완패하고 맙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가 아닌 독일계 러시아 화가인 Alexander Kotzebue가 그리게 되었지요. 그나저나 저 Kotzebue라는 이름은 뭐라고 읽는 거지요 ? 코쩨뷔 ?)
하지만 1799년 10월, 풍운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파리에 도착하자, 시에예스는 자신의 꿈을 이룰 유용한 도구로서 나폴레옹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시에예스는 자신이 석공이고 나폴레옹은 도구라고 생각했지요. 그는 역시 별로 존재감이 없었고 사실 별 생각도 없었던 동료 총재 뒤코(Pierre Roger Ducos)와 함께 나폴레옹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을 계획을 세웁니다.
한편 정작 나폴레옹 본인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집트에 버려둔 장병들의 귀환을 위한 노력도, 네덜란드에 상륙한 영국군도, 또 이탈리아를 침공한 오스트리아군도 아니었고, 쿠데타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세핀 문제였습니다. 이미 그는 이집트 원정 초기에 와이프의 불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동안 와이프를 비롯한 가족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코르시카인답게 고지식한 가족 윤리를 가지고 있던 그의 형과 어머니 등이 달려와 나폴레옹이 없는 동안 젊은 미남자들과 보란 듯이 놀아났던 조세핀의 행실에 대해 꼬치꼬치 고자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정말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조세핀과 이혼하겠다고 결심했고 조세핀을 직접 만나 그렇게 통보했지만, 결국 조세핀이 하루밤 동안 울며 매달리자 그만 모든 것이 없던 일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폴레옹 이 머저리...
(사람은 죽을 때 돈이나 일보다는 역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면서 죽는다고 하지요.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을 때 내뱉은 말은 "군대... 영광... 조세핀 !" 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조세핀 문제가 마무리되기도 전부터, 나폴레옹은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자들로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당시 파리는 한편에서는 과격 자코뱅의 쿠데타 음모와, 다른 반대편에서는 수구 왕당파의 반역 음모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라는 것은 제몫 챙기기에만 바쁜 총재 정부였으니, 모든 이들의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파라에 도착해서 보니,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기 보다는 마침 준비 중인 쿠데타에 자신이 때마침 딱 도착한 듯한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일단 총재 중 1명인 시에예스가 쿠데타에 앞장서고 있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나폴레옹이 할 일은 시에예스가 다른 장군들 말고 자신을 택하도록 자신의 의지만 보여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만 시에예스는 이때 나폴레옹의 인기와 태도를 보고는 '보나파르트의 칼은 너무 길군' 이라며 그의 야심이 너무 크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다른 장군을 선택하지 못했지요. 그 외에 나폴레옹을 찾은 이들은 수많은 군 장교들 외에도 전직 자코뱅이자 현직 치안 장관이었던 푸셰(Joseph Fouché), 바로 직전까지 외무부 장관이었다가 떨려난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은행가인 콜로(Jean-Pierre Collot)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방과 경제 부문에서 실정을 거듭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총재 정부는 이제 끝장이라고 보고 새로운 정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콜로(Collot)로 대변되는 파리의 은행가들은 정부에 빌려주었던 돈을 이대로 가다가는 떼먹히게 될까봐 무척 우려하고 있었고, 재정적으로 확실한 정부의 수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콜로는 거사 자금으로 50만 프랑을 내놓았습니다. 게다가 10월 23일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시엥(Lucien)이 500인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모든 것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듯 했습니다.
(결국 브뤼메르 쿠데타에서 나폴레옹의 뒷받침이 되었던 삼인방은 시에예스, 탈레랑, 그리고 푸셰였습니다. 이 초상화 속의 푸셰는 탈레랑과 함께 훗날 나폴레옹 권력의 핵심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 유명한 장군이 나폴레옹 하나 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물이었던 오슈(Lazare Hoche) 장군은 1797년 전선에서 병사해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가령 라인 방면군을 주로 담당했던 모로(Moreau)도 있었고, 징집제를 법제화한 주르당 법으로 유명해진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 모두를 하나하나 만나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던가, 아니면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모로 장군의 경우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잘 되었습니다. 이 둘은 프릭튀도르 쿠데타를 지원할 때부터 손발을 맞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주르당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더 어려웠습니다. 당시 라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패배를 당하고 실의에 빠져 마세나(Massena)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파리에 돌아온 그는 친 자코뱅파였거든요. 주르당과 뜻을 같이 하는 장군들 중에는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왼팔 역할을 하던 오쥬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현재의 총재 정부는 답이 아니라고 보고, 나폴레옹에게 협조는 하지 않되 그의 거사를 묵인해주기로 마침내 합의했습니다. 특히, 당시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치안군의 상당수가 과거 나폴레옹과 함께 이탈리아를 정복했던 이탈리아 방면군 출신이었다는 점이 나폴레옹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당시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17사단의 지휘관 르페브르(François Joseph Lefebvre)도 나폴레옹에게 협조해주기로 했습니다.
(훗날 나폴레옹에 의해 원수가 된 르페브르 장군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후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는데도 원수가 된 것을 보면, 나폴레옹도 은혜는 확실히 갚는 의리파인듯...)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Jules Bernadotte)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에 와있던 베르나도트는 1798년 8월,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하필 나폴레옹의 전 약혼자이던 데지레(Bernardine Eugénie Désirée Clary)와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과거 이탈리아 원정때에 잠깐 나폴레옹 밑에서 함께 작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초대에 대해 무척이나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은 잠깐이나마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할 때도 나폴레옹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국방장관의 직책을 맡아 가지고 있었으므로 상당히 중요 인물이었고 또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대해 물리적으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가 시작되던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아침에도 베르나도트를 불러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하고, 그것도 모자라 베르나도트와 동서지간이었던 자신의 형 조제프(그의 와이프가 데지레의 언니 줄리 클라리)에게 그와 식사라도 하며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훗날 스웨덴 국왕이 된 베르나도트의 모습입니다. 그가 이날 나폴레옹에게 밝힌 의사는 '너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회가 너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난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
정작 쿠데타는 시시했습니다. 미리 시에예스 및 뒤코와 짠 대로, 브뤼메르 18일에 자코뱅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500인 위원회(하원)와 원로원(상원) 의원들에게 흘리기 시작하면서 음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은 나폴레옹의 쿠데타와는 상관없이 실제로 돌던 것이라서 더욱 신뢰성이 갔지요. 이에 대응하여 시에예스와 뒤코는 동료 총재들을 설득하여 일종의 비상령을 선포하고 나폴레옹에게 정부의 방어를 맡기는 임명장을 발행했습니다. 이로써 파리 시내의 군사권이 공식적으로 나폴레옹에게 돌아갔지요.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었습니다. 아울러 나폴레옹은 상하원을 모두 위험한 파리 시내를 떠나 파리 서쪽의 생끌루(Château de Saint-Cloud)로 옮길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총재 정부의 수장 격인 바라스에게는 탈레랑이 파견되어 '좋은 말로 할 때 사임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의 집 밖에는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또 바라스는 이미 막대한 재산을 (물론 부정한 방법으로) 모아놓고 있었으므로 탈레랑이 바라스에게 '얌전히 물러가면 너와 너의 재산에 손을 대지는 않겠다'라고 하자 그는 군소리하지 않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동시에 시에예스와 뒤코도 미리 짜맞춘 각본에 따라,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총재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생끌루의 샤또(성)은 원래 오를레앙 가문의 소유로서 파리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1845년에 그려진 것으로서, 1870년 보불 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다고 하네요.)
나폴레옹은 이 쿠데타가 최대한 조용히 처리되어, 마치 합법적인 정부 교체로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5인 총재 중에 3인이 사임하여 과반수가 성립이 안되었으므로 이미 총재 정부는 무너진 상태였습니다만, 분위기 파악 안되는 '안 중요한' 2인의 총재, 즉 고이에(Gohier)와 물랭(Moulin)이 사임을 거부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불가피하게 이들은 모로(Moreau)의 부대에게 체포되어 끌려간 뒤 다음날에야 자필 서명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쿠데타 첫날은 아주 부드럽게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된 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아무 만족하여 집에 돌아와 '오늘 하루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어'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 못하고 있던 의원들은 그 전날 결의된 대로 파리 서쪽 교외의 생클루의 성으로 출근하는 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날 의원에 대한 설득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여 분위기 조성용으로 생클루 주변에 무장 병력을 잔뜩 배치해놓고 있었습니다. 이 병력들로 인해 의원들은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긴 결국 이날 중으로 모든 것을 밝혀야 했으므로 이 사실 자체는 문제가 될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역시 생클루에 출근하여, 미리 심어놓은 몇몇 쿠데타파 의원들이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여 새 정부 수립에 동의하도록 해주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폴레옹에게 날아온 소식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좀 멀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의원들을 설득하던 동생 루시엥이 오히려 기존 헌법에 손을 얹고 공화국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하는 판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판국에서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다 쓸어버려 !' 명령을 내리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열정과 비전(?)에 대한 자신감으로,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먼저 상원인 원로원을, 이어서 하원인 500인 위원회를 방문하여 의원들을 직접 설득하려 했습니다. 먼저 수자가 250명에 불과한 원로원에 갔던 것도 그다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상상과는 반대로, 그다지 훌륭한 웅변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특히 한 의원이 '헌법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 라고 묻자, 제멋대로 흥분해서는 '너희들이 스스로 프뤽티도르, 플로레알, 프레리알 등등의 사건에 헌법을 저버리지 않았는가 ? 이미 헌법은 아무도 준수하지 않는다 ! 혁명은 이미 끝났다 !' 라고 선언하여 의원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어서 방문한 500인 위원회에서는 더 사정이 나빴습니다. 그가 500인 위원회의 의원들이 모여 있는 홀로 들어가자마자 '독재자'라든가 '무법자' 등의 험악한 호칭들이 터져 나오면서 대한민국 의원들 못지 않은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몇몇 의원들의 손에 다소 얻어맞았고 최소한 한 명의 의원은 단검을 뽑아들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확실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광경이 부쇼(François Bouchot)에 의해 그려진 그 유명한 브뤼메르 18일 (18 Brumaire) 이라는 그림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을 구출해냈던 두 명의 척탄병은 나중에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된 뒤,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에 의해 정찬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는 영광을 누렸고, 특히 단검을 뽑아든 의원으로부터 나폴레옹을 지켜낸 토메(Thomé)라는 척탄병은 1만 프랑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 횡재를 누리게 됩니다.
(저 두 명의 척탄병 중 누가 토메였을까요 ? 아마도 한 명의 모델만 썼는지 두 명의 얼굴이 똑같아 보이네요. 어쨌든 이 그림은 1840년에 그려진 것이니 둘다 토메라는 병사의 실제 얼굴과는 거리가 멀 것 같습니다.)
아무튼 봉변과 망신만을 당하고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흥분 상태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생전 이런 꼴은 처음 당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때 위기를 극복한 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엥이었습니다. 500인 위원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모여 있는 병사들에게 짧고도 힘찬 연설을 하며 '500인 위원회가 역도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제 공화국을 위해 저들을 쓸어내야 한다'는 호소를 했습니다. 장교들이야 뭘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작 병사들은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지도 못했고, 사실 별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이든 쿠데타이든, 결국 병사들이 움직여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루시엥은 여기서 칼을 뽑아들고 형 나폴레옹의 가슴을 겨누면서 '만약 나폴레옹이 공화국을 배신한 것이라면 나 자신이 친형인 나폴레옹의 심장을 꿰뚫겠다'라는 쇼우맨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이 병사들에게 '나는 너희를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너희를 믿어도 되겠는가 ?' 라고 외쳤고, 병사들이 우렁찬 고함소리로 호응했습니다. 이어서 뮈라가 칼을 뽑아들고 '돌격 앞으로 !'를 외치면서 병사들은 500인 위원회가 모여있는 오랑제리(Orangerie) 관으로 돌격해들어갔고, 사태는 끝났습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창문을 통해 우르르 도망쳤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의원들은 병사들에게 얻어맞으며 쫓겨났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체포나 구금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집에 가라'는 식으로 처리가 되었던 것이지요.
(보나파르트 가문의 형제들 중 나폴레옹 빼고는 유일하게 뭔가 좀 능력이 있는 남자였던 루시엥 보나파르트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통령 정부에서 하필이면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가 음산한 비밀 경찰 대장 푸셰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어느 주식 중개인의 미망인과의 결혼 문제로 형인 나폴레옹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미국으로 가던 중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영국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살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대중들은 그가 나폴레옹을 버리고 왔다고 그를 환영했고 나폴레옹도 그가 자신을 배신하고 일부러 영국으로 갔다고 오해하여 이 형제들의 사이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나머지 과정들은 다소 지루한 정치 이야기이니 짧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먼저 도망쳤던 의원들은 결국 나중에 다시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와 나폴레옹과 시에예스, 뒤코의 3인 통령 정부 (Consulate) 출범에 대해 찬성표를 던져야 했습니다. 이 3인 체제는 바로 다음날 출범하는데, 쿠데타의 기획자인 시에예스의 의도와는 달리, 눈치없는, 혹은 눈치가 너무 좋았던 뒤코는 나폴레옹에게 제1통령 자리는 당연히 당신 것이라며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어 시에예스를 실망시킵니다. 시에예스는 이 통령 정부의 브레인으로서, 나름 치밀한 새로운 헌법을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시에예스는 종신 대선거관이라는 자리를 나폴레옹에게 제안하며, 무려 6백만 프랑 (현재 가치로 약 740억원)의 연봉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생활, 3천명의 경비병 등의 혜택으로 그를 유혹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이것이 허울 뿐인 명예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오히려 그를 윽박질렀습니다. 결국 새로운 헌법, 즉 혁명력 제8년 헌법은 나폴레옹의 입맛대로 다 바뀌어 발표되었고, 곧이어 시에예스와 뒤코도 당시 법무 장관이자 나폴레옹에게 협력하던 캉바세레스(Jean Jacques Régis de Cambacérès), 그리고 왕당파이던 르브렁(Charles-François Lebrun)으로 교체되어 버립니다. 시에예스는 이때가 되어서야 나폴레옹이 단순한 쿠데타라는 조각품의 도구가 아니라 주문자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은 셈이었지요. 시에예스는 이때 나폴레옹의 역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Il sait tout, il peut tout, il fait tout."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을 한다)
(좌로부터 캉바세레스, 나폴레옹, 르브렁입니다. 시에예스와 뒤코는 취임하자마자 사퇴하게 되어 이런 그림을 그릴 틈도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경우가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쿠데타 바로 다음날, 총재 정부가 남긴 80만 프랑의 공금을 시에예스와 뒤코 둘이서 마음대로 나눠가지게 해주었고 (그나마 둘이서 서로 더 많이 가지겠다고 싸워, 결국 시에예스가 60만, 뒤코가 20만 프랑을 챙겼다고 합니다), 잠깐동안만 통령직에 앉았던 시에예스가 퇴임할 때는 크론(Crosne) 지방에 넓은 땅을 선물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이후 시에예스나 뒤코가 프랑스 중요 역사에 등장하는 일은 전혀 없게 됩니다.
아직 제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지요. 쿠데타를 가능하게 해주는 3가지 요소 중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정치에 신물이 나서 '누가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 말입니다. 이때 프랑스 국민들은 그야말로 '총재 정부만 아니면 아무나 다 괜찮아' 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사실 아무나 다 괜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왕당파가 되돌아와 전에 교회와 귀족들이 소유했다가 이제는 민간인들이 소유하게 된 토지 자산들을 되찾으려 하는 일은 부르조아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시냐 지폐와 단두대로 상징되는 자코뱅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일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질서와 안정, 그리고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그런 부르조아 시민들에게, 오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종지부를 찍어주었고, 강력한 리더쉽으로 안정을 찾아줄 것으로 보였던 나폴레옹은 매우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부르조아 이외의 시민들, 즉 파리의 서민들인 상 퀼로트(Sans Cullotte)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숙청하고 탄생한 총재 정부에 대해서 전혀 동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총재 정부를 무력으로 몰락시킨 독재 세력에 저항하여 과거처럼 총검이나 하다못해 쇠스랑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오는 상 퀼로트들은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상퀼로트이 모습입니다. 이런 아저씨들이 쇠스랑 들고 다들 뛰어나오면 버텨낼 독재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이렇듯,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자코뱅이라는 양쪽 극단 세력 사이에 위치한 대안이었습니다. 동시에, 나폴레옹의 새로운 통령 정부는 이 양쪽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매우 현실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양쪽을 모두 포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먼저 자코뱅과의 화해는 쉬운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이 자코뱅 중에서도 급진파인 산악당(몽따냐르 Montagnard, 국민공회 당시 의원석의 높은 곳에 모여 앉아 생긴 별명으로, 로베스피에르가 그 리더격이었습니다)으로 자처할 정도로 자코뱅 출신인데다, 자코뱅들은 왕당파만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혁명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자코뱅의 리더격이던 주르당 장군을 다시 등용하여 자코뱅들에게 정권에 참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문제는 왕당파의 위협은 더욱 구체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데 지방의 왕당파 반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지요. 그는 곧바로 왕당파와 실제로 방데 지방에서 반란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네빌과 당디녜를 불러들여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실제로 1800년 1월, 방데의 지도자인 카두달(Georges Cadoudal)이 투항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왕당파들이 내세우는 저항 이유 중 하나인 카톨릭의 수호에 대해서는 꽤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결코 그가 카톨릭을 믿기 때문이 아니었고, 나중에 이야기했듯이 '가난뱅이들이 부자들의 담을 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도구'로서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태도는 결국 1801년의 정교 협약(콩코르다 Concordat)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자코뱅과 왕당파와의 완전 화해는 쉽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나폴레옹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왕당파이자 대표적인 올빼미당 지도자인 카두달의 초상입니다. 그는 나중에 결국 큰 사건을 한방 터뜨리고 맙니다.)
그 외에도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답게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았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언론 통제에 열을 올려, 혁명 이후 난립했던 신문사들 73개 중 자신에게 비호의적인 신문사 60개사를 폐간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이 조치를 내리면서 비서이자 친구인 부리엔에게 '언론이 자유롭다면 자신은 3개월도 권좌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그는 잠재적인 경쟁자인 모로(Moreau) 장군의 거취에도 부쩍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모로 장군은 자코뱅이 아니었던지라 그때 즈음해서는 왕당파 사람들과의 교류가 잦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온갖 아첨꾼들과 협잡꾼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가족들을 감독하고 보호해야 했고, 자신의 심복이자 마초맨인 뮈라(Murat)와 여동생 카롤린을 결혼시키는 일도 치루어야 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뭐니뭐니해도 파탄이 난 국가 경제를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었을 때, 국고에 남은 80만 프랑을 시에예스와 뒤코에게 쿨하게 나눠주고 난 뒤 프랑스 재무성은 정말 텅텅 빈 상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맨 처음 행한 것은 고댕(Gaudin)이라는 옛 왕정 시대의 관리를 재무 장관으로 앉힌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고댕을 통해, 안정적이고 투명한 세금 제도가 유지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과거처럼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층이 없도록 하고, 세금으로 들어오는 돈과 정부가 지출하는 돈이 수지가 맞도록 노력했지요.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경제가 파탄이 난 상태라 세금에 의한 수입이 워낙 적었습니다.
이 문제를 위해 나폴레옹이 택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하고 또 계속 해왔던 짓, 즉 갈취였습니다. 그는 먼저 파리, 리옹, 마르세이유, 보르도 등지의 상인들로부터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치하에 있던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에게도 수백만 프랑의 돈을 뽑아냈고, 포르투갈에게서도 8백만 프랑의 돈을 뜯어냈습니다. 1800년 3월에는 암스테르담의 시민들로부터 다시 1천만 프랑을 뜯어냈습니다. 그러나 계속 돈이 부족했으므로, 나중에는 당대의 갑부들 개인으로부터도 돈을 뜯어내 무려 6천2백만 프랑을 쥐어 짜냈습니다. 가령 당시 유명한 군납업자이자 은행가였던 우브라르(Gabriel-Julien Ouvrard)는 1800년 1월 군납 비리를 죄목으로 나폴레옹의 직접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가, 조사 결과 혐의가 없다고 하며 무죄 석방되어 다시 군납업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직후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군수품을 납품하며 돈을 벌었지요. 통설은 이 모든 체포와 무죄 석방, 그리고 군납업자로 다시 선정된 사건들 뒤에는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돈을 뜯긴 것과 상관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역대 독재정권과 밀착하여 돈을 바치고, 가끔씩 꼬투리를 잡혀 감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금방 나오고 하는 과정과 무척이나 흡사합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개인 축재 뿐만이 아니라 국가 재정 확충에도 이렇게 갑부들 주머니를 많이 털었다는 점이 약간 다르지요. 가령 브뤼메르 쿠데타 때 돈을 댔던 은행가 콜로가 그 돈의 상환을 요구하자 나폴레옹은 빚 갚기를 거절하고 콜로를 정말 글자 그대로 집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권력은 짧고 돈은 오래 간다고,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우브라르는 재력을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다만 말년에 사업운이 좋지 않아 파산한 뒤, 런던에서 초라하게 살다 죽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좌익 빨갱이식 정치가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가 꿈꿨던 프랑스는 오로지 세금을 제대로 내는 중산층을 위한 국가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혁명력 제8년 헌법에도 투표권은 모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재산을 갖추고 세금을 제대로 내는 사람들에게만 주었지요. 나폴레옹이 부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낸 이유는 오직 하나, 돈이 그들에게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탈식 경제는 그리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부자들이라고 땅파먹고 장사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나폴레옹은 새로운 돈주머니를 곧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과 다른 외부 요인들이 결합하면서, 나폴레옹은 1800년 이탈리아 북부의 마렝고로 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