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편 (척탄병 코이녜의 모험은 그냥 외전으로 치시지요)에서는 브뤼메르 쿠데타로 프랑스의 1인자, 즉 제1통령 자리에 오르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실 것이 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과연 몇명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을까요 ? 몇명의 병력으로 당시 유럽의 최강국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요 ?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5천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군대는 주로 'xxx 방면군' (armee de xxx)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국경 지대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파리 시내를 경비하는 병력은 전통적으로 5천명 수준에 불과했지요. 더구나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불과 300명 수준의 경호대원만 데리고 돌아온 '홀홀단신' 신세로서, 그가 가진 것은 대중들의 집중된 인기와, 몇몇 정치인들의 협조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체 프랑스의 권력을 불법적인 쿠데타로 장악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요 ? 정말 나폴레옹은 전체 프랑스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을까요 ? 그랬다면 오히려 좀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의 권력은 그다지 탄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파리의 관료들 정도에게 머물고 있었고, 그는 감히 국경지대에서 각 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군들의 지휘권을 뺏거나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이 그렇다보니, 당장 자기 자신의 군대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한 1개 사단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 전쟁의 상황. 저 아래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항로는 바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로...)
나폴레옹이 당면한 문제는 많았습니다. 국민들의 경제 생활 안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왕당파와 자코뱅파들의 음모 분쇄까지 모두가 중요했지만, 일단 당장 처리해야 하는 것은 그를 이집트에서 프랑스까지 단숨에 달려오게 한 그 사건들이었습니다. 즉, 제2차 대불 동맹군들의 프랑스 침공을 분쇄하는 것이었지요. 애초에 그를 막으라고 불렀는데, 정작 외부의 적을 향해야 할 칼을 내부로 돌려 정권을 찬탈했으니, 이건 진짜 좀 아니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정이 그럴만 했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밀라 요보비치 나오는 액션 영화 '삼총사'에 이런 장면이 나오던군요. 주인공 달타냥의 애인이 악당들에게 납치되어, 달타냥에게 왕비의 목걸이와 바꾸자고 하는데, 이걸 내주면 조국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 빠져 큰 곤경에 빠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조국이냐 애인이냐 사이에서 고민하는 달타냥에게, 선배 아토스가 한마디 하지요.
"프랑스는 제 앞가림 제가 알아서 할테니, 넌 니 애인을 구해라."
(아,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십시요. 요보비치가 달타냥의 애인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용맹무쌍한 여자에게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
이건 사실 프랑스 같은 강대국이나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랬습니다. 나폴레옹이 '나 아니면 안돼' 하면서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달려왔으나, 정작 와보니 나폴레옹 없이도 프랑스는 제 앞가림을 알아서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1799년 8월말 북부 네덜란드에 무려 4만의 병력으로 상륙했던 영국-러시아 연합군은 처음에는 칼란트수그(Callantsoog, 뭐라고 읽는지 모르겠음) 전투에서 승리하며 분위기가 좋았으나, 프랑스의 브륀(Brune) 장군과 네덜란드 (정확하게는 바타비아 공화국) 군의 반격에 부딪혀 결국 불과 3개월 후인 11월에 프랑스군과 휴전을 맺고 보따리를 싸야 했습니다.
(네덜란드 침공을 준비 중인 영국-러시아 연합군)
(칼란트수그에 상륙작전 중인 영국군)
또 1799년 7월, 오스트리아의 군사 천재 카를 대공이 이끈 오스트리아군이 제1차 취리히(Zurich) 전투에서 마세나의 헬베티아 방면군 (amry of Helvetia)을 격파하고 스위스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지만, 병력을 충원한 마세나는 불과 2달 뒤인 9월에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완파, 다시 취리히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완전히 제2차 동맹 전쟁에서 탈퇴하도록 만듭니다. 가만 보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프랑스군을 나폴레옹이 지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이 지휘한 것이 프랑스군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지요.
(나폴레옹이 인정한 남자, 마세나의 위엄을 보십시요.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다시 북부 이탈리아였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1796~1797년 원정시 정복했던 곳인데, 나폴레옹에 못지 않은 빛나는 무훈을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의 노장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였습니다. "총알은 빗나간다, 그러나 총검은 그러지 않는다" 라는 말로 유명한 그는 당시 70세의 노장으로서, 당시 짜르였던 파울 1세 (Paul I)의 미움을 받아 이미 은퇴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믿을 만한 장군이 없었던 파울 1세가 그를 불러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쳤던 것입니다. 그는 카사노(Cassano)와 노비(Novi) 등지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그야말로 북부 이탈리아를 석권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스위스의 일부와 서해안의 제노바(Genoa) 정도만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이 정복해놓은 영토를 모두 상실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보로프 장군은 원래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아버지가 그의 군 입대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꾸준한 운동과 노력으로 결국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년에도 허약해보이는 외모는 고칠 수 없었나 보군요.)
(밀라노에 입성하는 수보로프 장군)
그러나 그는 제2차 취리히 전투의 결과로 인해 결국 후퇴해야 했고, 게다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바람에 알프스의 눈덮힌 산길을 강행군하여 탈출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겪지요. 어쨌거나 수보로프는 평생 단 1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위엄을 보존한채 러시아로 귀환했고, 이듬해인 1800년 5월, '전장에서 나폴레옹과 대결한다'는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이런 수보로프 장군의 활약 덕택에, 비록 러시아는 수보로프의 영웅담 빼고는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었지만,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돌아왔을 당시 북부 이탈리아는 완전히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프랑스는 그야말로 제노바 외에는 쥐고 있는 곳이 없었지요.
(알프스의 험준한 협로를 넘어 퇴각하는 수보로프. 수보로프의 이 전술적 퇴각은 당대의 칭송거리였고, 이 덕분에 그는 제정 러시아 역사상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원수 (Generalissimo)의 지위에 임명됩니다.)
(알프스 고타르(Gottard) 수도원에 도착한 수보로프 장군. 그가 식사를 하거나 쉬었던 의자, 침대 등은 모두 지금 대단한 유품으로 전시되고 있다고 하네요.)
수보로프의 철수 이후, 제노바에서 한동안 숨을 돌리고 있던 마세나는 곧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제2차 취리히 전투의 승리자였던 마세나는 그 병력 6만명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초기에는 꽤 여유가 있었으나, 질병으로 인해 병력이 차츰 줄어 4월 무렵에는 불과 3만6천으로 대폭 단촐해진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북부 이탈리아를 석권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멜라스(Michael von Melas)는 총 12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멜라스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무래도 수적 열세에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라, 마세나는 용감하게 반격했지만 결국 제노바에 갇히게 됩니다. 게다가 곧 영국 해군이 몰려와서 제노바 앞바다를 장악하면서, 마세나는 꼼짝없이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게 되지요.
나폴레옹은 마세나를 구출하고 북부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는 뭔가 근사하고 멋진 승리를 하나 낚아올려서, 자신의 불완전한 권력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제노바 구원군을 조직했습니다. 다만 그가 이렇게 제노바 구원에 나선다고 하면 오스트리아도 대비를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가급적 비밀리에 진행을 시켰지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예비군(armée de réserve)라는 기묘한 존재였습니다. 영국 방면군 등 이곳저곳의 병력을 조금씩 빼어내 만든 이 군대는 대외적으로 볼 때는 무척 보잘 것 없는 그야말로 예비군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대외 언론에 노출된 이 군대에 대한 신문 만화는 소년들과 노약자들로 구성된 형편없는 군대로 묘사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이 군대의 지휘관은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였습니다. 나폴레옹 본인과의 관계는 최대한 감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의 치밀한 작전으로서, 오스트리아의 간첩들로 하여금, 이 군대의 목적은 오로지 허장성세라고 본국 정보부에 보고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폴레옹은 작은 단위로 이 예비군 소속 부대를 나눠 스위스 인근 디종(Dijon)으로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디종 시내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마세나가 아무리 굳센 장군이라고 해도, 굶는 것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니까요. 그의 기본 전략은 정말 매우 나폴레옹다운 것이었습니다. 제노바를 구원한답시고 제노바로 직행해서 그를 포위 중인 오스트리아군과 부딪혀봐야, 딱히 승패를 예측하기도 어렵고, 이긴다 해도 피해가 클 것이므로, 그런 뻔한 전술은 쓰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전통적인 약점, 즉 후방과의 연락이 끊기면 극도로 당황한다는 점을 노렸습니다. 즉, 제노바를 포위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뒤로 돌아들어가서, 제노바의 마세나와 협공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역포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뒤로 돌아들어간다는 것이 말이 쉽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1796년 나폴레옹이 1차로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도 그랬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방법은 지중해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알프스 때문이었지요. 알프스는 고대로부터 지중해 문명의 로마와 갈리아의 골족, 그러니까 프랑스인들의 조상들을 분리하는 자연 장벽이었지요.
(보기에는 멋지지만, 걸어서 넘기에는 좀...)
하지만 인간은 나름 끈질긴 족속이어서 알프스 정도가 완벽한 장벽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골족, 킴브리족, 한니발의 카르타고군 등이 자주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했었지요. 이제 기원후 1800년이나 지난 후, 다시 한번 골족의 군대가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풍요로운 땅 롬바르디아를 침공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했다가 마리우스 장군에게 격파당하는 킴브리족과 튜톤족들...)
나폴레옹이 이끈 '예비군'은 총 6만명 정도였는데, 이 중 4만명이 나폴레옹과 함께 유명한 생-베르나르(Saint-Bernard) 협곡을 넘을 계획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분산되어 다른 길로 넘었고요. 5월 15일, 나폴레옹군의 전위대가 아오스타(Aosta)에 집결하였고, 마르티뉘(Martigny)에서 병사들은 3일분 식량을 지급받았습니다. 대포와 짐마차들은 모두 분해되어 각 부품을 병사들이 등에 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병사들 개개인은 약 30kg 정도의 짐을 더 떠매게 되었지요. 물론 대포의 포신 자체는 한덩어리의 청동이다보니 조각내어 개개인이 떠매고 갈 수가 없었지요. 이렇게 대포와 같은 큰 부품은 소나무를 잘라 반쪽으로 쪼갠 뒤, 마치 원시인들의 통나무배처럼 속을 파낸 뒤, 거기에 포신을 넣은 뒤 노새들이 끌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5월의 알프스는 아직 눈도 녹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서, 억센 노새들도 지쳐 쉽게 죽어넘어졌습니다. 이렇게 노새들이 녹다운되면 그 다음엔 병사들과 스위스 노무자들이 이런 통나무를 끌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포를 끈 병사들과 노무자들에게는 후한 금전적 보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 그림 속 가운데 부분의 개를 보면 저기가 생 베르나르 협곡이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
(왠 개 이야기냐고요 ?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생 베르나르보다는 세인트 버나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개는 저 수도원에서 이미 17세기부터 구조견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목에 저 유명한 브랜디 술통을 매달고요. )
이렇게 전진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1줄로 산길을 통과했는데, 하루에 통과하는 병사의 수는 약 6천명이었다고 하며, 가는 곳곳마다 군악대가 신나는 군악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 생-베르나르 협곡에는 유명한 수도원이 있었는데, 나폴레옹도 여기서 하루밤 유숙했고, 또 생-베르나르 협곡의 최정상 부분에는 수도사들이 나와 통과하는 병사들 모두에게 2잔씩의 포도주와 치즈를 얹은 귀리빵 1조각씩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대체 수도사 양반들이 왠 포도주를 그렇게 많이 비축하고 있었을까요 ?)
(이 다비드의 그림들은 모두 총 5개 버전이 있다고 합니다. 원래 이 그림은 1800년, 스페인의 고도이 왕자와 나폴레옹이 국교를 회복할 때 고도이 왕자가 나폴레옹에게 주는 선물로 다비드의 그림을 받을 '상품권'을 선물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상품권'으로 알프스를 건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도 안되게 화려한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했고, 여러 궁전과 집무실에 걸기 위해 총 5점을 그리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예전 중고등학생 참고서에 많이 나오던 맨 윗그림이 가장 유명하지요.)
이렇게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훗날 다비드의 그림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다만 이 그림은 나폴레옹 본인의 세심한 연출을 주문받아 만들어진 것이라서, 실제의 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영웅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용맹한 백마를 타고 무언가 저 높은 곳을 가리키는 인상적인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초라하지만 굳세고 안정적인 발걸음을 가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이 노새 버전의 그림은 나폴레옹 사후 한참 후인 1850년에 들라로슈(Hippolyte Delaroche)가 그린 것입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이 권좌에 있을 때는 이런 그림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요.)
이렇게 협곡을 넘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았을까요 ? 당연히 위험했습니다. 당시 몇명의 병사가 산에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만, 당시에는 노스페이스나 네파 같은 아웃도어 물품이 없었으므로 많은 병사들이 추위와 미끄러운 눈길에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한번은 미끄러져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막스 갈로의 소설 나폴레옹에도,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이 산길을 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 한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저 들라로슈의 그림에 나오는 길안내꾼 덕택이었습니다.
(이 이름없는 길안내꾼에게도 꽤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실 이 사람의 이름도 분명치가 않아서, 피에르 니콜라 또는 장 밥티스트 니콜라 등 여러가지 버전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도르사즈(Pierre Nicholas Dorsaz)라는 이름의 이 길안내꾼은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라는 스위스 시골 마을 출신의 농부였는데, 이 양반은 자기가 고삐를 잡고 있는 노새를 탄 사람이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촌사람과 굳이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갈로의 소설에도 인용된 사건, 즉 나폴레옹의 노새가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 한 일이 있었는데, 노새의 고삐를 굳게 쥐고 있던 도르사즈가 나폴레옹을 구했습니다. 그때부터 나폴레옹은 이 농부와 대화를 좀 하기 시작했답니다. 나폴레옹은 도르사즈에게 이런 안내일의 품삯이 얼마인지 물었고, 그는 보통 3프랑(약 3만7천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그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농장과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지요. 나폴레옹은 다시 그런 것을 사려면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고, 그의 대답은 약 60루이(Louis d'Or, 당시의 1루이 금화에는 약 7그램의 금이 들어 있었으므로, 현재 가치로는 약 2천만원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좀 갈립니다. 혹자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즉석에서 60루이를 지불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끝난 뒤인 1800년 10월에 알프스에서의 '헌신과 열정'에 대한 보상으로 1200 프랑 (약 1천5백만원)이 지불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도르사즈는 나폴레옹의 답례금으로 원하던 농장과 집에 소까지 샀고, 덕택에 사랑하던 아가씨와의 결혼에도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루이 금화입니다. 이거 60개면 스위스에 작은 집이 딸린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니, 확실히 당시엔 부동산이 쌌나 봅니다.)
이런 일화를 남기고 알프스를 건넌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오스트리아군의 허를 찌른 셈이 되었습니다. 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6월 2일 롬바르디아의 수도 밀라노(Milan)를 점령합니다. 제노바를 포위 중이던 오스트리아군은 당장 본국과의 연락로가 위협받게 되어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허를 찔리는 것은 항상 오스트리아군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며칠 후, 나폴레옹 또한 일련의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에게 허를 찔리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