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사람보다 빠르다. 잊고 지냈다. 2016년 겨울,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 코스트의 작은 마을 에르끼에(Erchie)에서 의 작은 사건 전까지는.
사람보다 냄새도 더 잘 맡고 귀도 밝은 개가 어쩌다 사람에게 목줄이 묶여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을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제 먹이를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예속적으로 살게 된다.
시리아 (Siria)라고 했나? 몸이 길고 날씬한 중형 황구다. 밤이라 검은 눈알은 더 새카맣게 반짝이고 눈가는 아이라인을 그린 듯하다. 네 발의 발톱은 모두 새카맣고 단단하다. 붉은색이 도는 갈색 털은 윤기가 나고 귀는 뾰족하다. 영리하게 생겼건만 왜 이리 겁이 많을까? 몸을 탁자 아래로 숨기고 나올 생각을 않는다.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니 몸을 떠는 게 느껴진다. ‘겁이 많은 개는 잘 문다는데…….’
뜨내기 관광객은 모두 떠나고 친구가 귀한 바닷가 작은 마을의 추운 겨울밤. 한국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겨울에는 역시 뜨거운 국물 요리 아닌가? 한참을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며 프랑키나(Franchina)가 방목해서 키운 염소 고기 국물 요리를 다 먹어갈 때다.
연골과 뼈가 좀 남았다. 주인인 파올라(Paola)는 채식 주의자지만 개를 완전히 채식으로 키울 수는 없는 일. 파올라는 남은 연골 조금을 시리아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염소 연골을 입에 댄 순간부터 시리아는 수줍음도 겁도 잊었다. 주인에게 얻은 두 조각의 부드러운 뼈를 순식간에 아드득아드득 해치우더니, 세넴(Senem) 옆에 딱 붙어서는 결국엔 남은 뼈를 모두 먹어치웠다.
식사가 끝난 후에 몇몇은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나가고,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기다렸다. 세넴이 작은 나무 바구니에 초콜릿과 쿠키를 담아 내왔다.
다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갑자기 시리아가 전문적 도둑의 면모를 드러냈다. 무슨 만화 영화도 아니고, 소리도 없이 사뿐히 의자를 타고 올라가더니 식탁 위 바구니에서 초콜릿을 하나 입에 물고는 재빨리 식탁 아래로 숨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금박에 싸인 동그란 작은 것이 먹는 것, 그중에서도 맛있는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너무나 놀라 어머나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격자는 단 한 명, 나뿐이다. 순간, 양파 섞인 고기를 훔쳐먹고는 헤모글로빈에 문제가 생겨 온 잇몸이 하얗게 변한 채 사경을 헤맸던 우리 개 복순이가 생각났다.
‘양파나 초콜릿이나 모두 개에게 치명적이다. 먹는 걸 막아야 한다!’ 아무 계산도 없이 손을 뻗었다.
개는 사람보다 빠르다. 그때 알게 되었다. 시리아의 하얗고 뾰족한 이를 본 것 같다. 손이 뜨끔거린다. 아! 손등에 구멍이 뽕뽕뽕 하고 세 군데 났다. 빨갛고 뜨거운 피가 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세넴과 파올라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왔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던 출혈은 세넴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프로폴리스를 바르자 진정됐다. 상처에서 흐르던 검붉은 피는 용암처럼 도톰하고 오돌토돌하게 신기한 모양으로 굳었다. 손등에 산딸기 마멀레이를 한 스푼 발라놓은 듯도 했다.
시리아의 주인 파올라가 너무 미안해한다. “피가 굳은 모양이 산딸기 같이 귀여워.”하고 웃었다. “괜찮아.”하고 웃지만 쓰리고 아프다. 광견병 예방 주사는 맞혔다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흥분한 개에게서 먹이를 빼앗으려 했으니 따지고 보면 내 실수다. 개의 본성을 잊었다. 잘 눌려 놓았지만 개는 늑대의 후손 아닌가?
뾰족한 이를 드러냈던 시리아는 훔친 먹이를 다 먹고 나자 다시 눈이 순한 애견으로 돌아왔다. 주인에게 혼도 나고, 제 잘못을 분명히 아는 듯하다. 한참 지나자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기다란 주둥이를 내 다리에 올린다. 사과의 몸짓이다. 물리지 않은 오른손으로 괜찮다고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연초 액땜 한 셈이다. 작은 액으로 큰 액을 땜질해 막았다.
다만 아쉬운 것 하나. 오늘 하루 종일 한 일이 어쩌면 헛수고가 될 지도. 한국의 도토리 묵을 보여주겠다며 친구들과 아말피 해안 산기슭에 떨어진 잘 익은 야생 도토리를 모았다. 일일이 겉껍질을 깐 후 떫은맛을 빼려고 물에 담가두었다. 내일은 그 손이 많이 간 야생 도토리로 드디어 묵을 만드려고 했는데……. 왼손잡이인 내가 왼손이 물렸으니 일이 영 어렵게 됐다. 덧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2016년 1월 2일, 이탈리아 아말피 코스트 에르끼에
표지 사진 모델은 양파 섞인 고기를 몰래 먹고 사경을 헤매었던, 한국에 살고 있는 막내 ‘복순’입니다. 사진을 보니 장난으로라도 뽁뽁이 장난감을 절대로 뺏기지 않겠다는 결심이 날카로운 눈빛에서 엿보이는군요.
사진: 이지윤, 모델: 복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