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성 난청’ 일지 5
2021년 10월 28일, 이탈리아에서 저는 갑자기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2024년 9월 28일,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향하는 고속 열차 안에서 다시 ‘돌발성 난청 (Sudden Hearing Loss)’ 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늦은 봄날. 우리는 푸른 잎들을 활짝 피워 올린 포도밭 사잇길을 걷고 있었다. 선글라스와 모자도 챙겼지만 덥기는 매한가지. 땡볕 아래라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 좋다! 우리 동네도 이렇게 좋은 걸. 어째서 우린 그렇게 멀리 여행을 다니는 걸까? 전 세계 사람들은 이 동네로 몰려오는데.”
어째서 피렌체였을까? 걷다가 갑자기 피렌체 여행을 가잔다. 이유는 단 하나. 함께 걷던 일행 중 하나가 피렌체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해서다.
“뭐라고? 정말? 당장 같이 가자!”
페레로 본사 관리직에서 막 은퇴를 한 후 3년을 계획하고 아주 열심히 여행 중인 커플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은퇴한 자들의 일정이 어째 더 빡빡하다. 그날 저녁 문자가 왔다. 가장 가까운 시일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첫 번째 주말은 9월 말이라고 했다. ‘9월 말? 트러플 시즌 코 앞이라 아주 바쁜 시긴데 괜찮을까?’ 4개월 후의 일이 벌써 걱정이 되었다. “넌 레스토랑 일로 바쁠 테니 아무 걱정 마. 우리가 집 앞으로 픽업 갈 게. 기차표도 우리가 끊고, 우피치 미술관 예약이랑 숙소도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성사된 피렌체 번갯불 여행.
출발은 9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고개가 갸우뚱해질 정도로 과하게 이른 아침 시간이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해도 충분할 시간인데 너무 서두른다. 이탈리아와 벨기에 사이를 빛의 속도로 오가느라 자주 과속을 한 탓이란다. 벌점이 쌓여서 운전면허 점수가 거의 다 깎인 탓에 한 번 더 과속을 하거나 하면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나? 그렇게 느림보 차를 타고 피렌체행 기차를 타러 토리노로 향했다.
어느새 붉은 해가 떠오르나 보다. 모래가 들어간 듯 서걱거리는 감은 눈꺼풀 위로 뜨거운 빛이 느껴졌다. 따스한 햇살이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꺼끌 거리는 눈과 따가운 목구멍, 잠을 거의 자지 못 한 탓이다.
금요일이라 어제 서비스와 마감 청소를 끝내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아……. 울고 싶다. 어쩌자고 나는 그 팔자 좋은 커플에게 예스를 날린 거지?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여행을 취소하거나,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잘 수도 없는 일. 우선 주방의 온갖 냄새 세례를 받은 일주일 치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어찌어찌 여행짐을 챙겨 넣고 캐리어를 닫았다. 손도 까딱 할 힘이 없는데, 도무지 내일 아침, 아니 몇 시간 후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말릴 자신이 없다. ‘역시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지.’ 될 대로 돼라 하고 샤워기 아래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천국도 잠깐, 샤워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세탁기에서 ‘띵 띵 띠리리링~’ 세탁 종료음이 울린다. ‘휴~’ 수건을 머리에 둘둘 말고 조리복을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아무래도 침대에 누웠다가는 알람 소리도 못 듣는 대참사가 날 듯하다.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린 뒤, 두꺼운 샤워 가운을 입고, 소파에 누운 후 이불을 덮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아침인가? ‘고객님, 택시가 대기 중입니다.’ 은퇴 커플의 장난기 가득한 문자다. 창밖을 보니 검은 랜드로버가 정말 떡 하고 주차해 있는 게 아닌가? ‘은퇴한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부지런한가? 약속 시간보다 15분이나 일찍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출발한 여행. 무엇보다 눈과 목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다. 트렌이탈리아 프레챠로싸 퍼스트 클래스도 다 필요 없고 입도 꾹, 눈도 꼭 감고만 있고 싶다. 내 마음도 모르는 채, 친구들은 신이 나서 깔깔거린다. 함께하는 여행의 묘미라며 마주 보는 동반석을 예약한 탓에 세상 무시하고 잘 수도 없다.
초고속으로 달리던 기차가 터널을 몇 번이나 지났을까? 순간, 웃고 떠들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리 웅웅 거리는 듯했다. 도무지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귀에 물이 들어간 느낌.
순간, 몇 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패닉이다. 손바닥으로 귀를 지그시 눌러 진공으로 만들었다가 재빨리 손을 뗐다. 싱크대 물이 막혔을 때 뽁뽁이로 뚫듯이. 침을 삼키고, 물을 홀짝이고 일부러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하품을 했다.
그렇다. 오른쪽 귀를 멀게 한 ‘돌발성 난청’이 돌아온 거다. 이번엔 멀쩡한 왼쪽 귀까지 집어삼키려고.
표지 사진: 이지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응급실에서
Ospedale Santa Maria Nuova Pronto Soccorso, Firenze
2024. 09. 28
누군가가 저처럼 돌발성 난청 증상으로 두려운 순간순간을 보내시고 계신다면, 저의 기록이 도움이 될까요?
아래 네 꼭지의 글은 돌발성 난청 일지 1~4화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5화를 쓰게 될 날이 다시 올 줄은 몰랐습니다.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41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44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45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