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도 장사다! 의사에게 언제나 "네,네" 하는 착한 환자가 되지 않기로
“귀는 좀 어때?” 한국에 다녀와서 친구들이 물은 첫 번째 질문이다. “이야기하자면 긴데, 결론은, 일단 그냥 지내기로 했어.” 그렇다. 정말 그냥 일단 지내기로 했다. 오른쪽 귀에 24시간 내내 풀벌레 콘서트를 계속 듣는 걸로. 가끔 ‘휙휙’ 하는 강하고 세찬 바람 소리도 귀를 스치긴 하지만.
요는 이렇다. 작년 10월 28일 목요일 오후 4-5시경, 갑자기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갑자기?” “응, 갑자기.” “이유는?” “그걸 알면 이 병이 나았겠지?”
‘돌발성 난청’, 내 병명이다. 어쩌면 증상의 정황 정도 되는 이름일 게다. 돌발적으로 일어난-그렇다. 정말로. 돌발적으로.-청력 이상.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응급 질환으로 분류된다. 적어도 3일 안에 고용량의 스테로이드 약물을 먹거나 혹은 주사로 맞고, 심한 경우 고압 산소 치료를 받는다. ‘한국에서는’이라고 운을 떼니 눈치채셨겠지만, 나의 경우는…… 나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청력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하필 이탈리아 휴일이 길게 끼어 있었으니 전문의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까스로 만난 두 명의 의사는 모두 귀 염증으로 오진을 했다. 그 후 간 큰 병원에서는 “이탈리아의 프로토콜은 다릅니다.”라며 고실내 주사도, 고압 산소 치료도 권하지 않았다. 난 착하게 그 큰 병원 의사 말을 네네 하고 들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내 오른쪽 귀는 내게 빠이빠이를 확실하게 고하고 아주 깔끔하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우는 아이는 젖 주고, 두드리면 문은 열린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고압 산소치료 클리닉에 직접 연락을 했다. 감사하게도 아는 의사의 도움으로 소견서를 받고, 주치의의 동의도 얻어 고압산소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쿠네오 큰 병원에서 그렇게도 못&안 주겠다던 고막 주사도 친절한 고압산소치료 원장의 소견서 덕분에 맞을 수 있었다. 문제는, 모든 치료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거였다.
“심장마비 아시죠? 그 갑작스러운 극단적인 마비가 오른쪽 귀에 일어난 겁니다.” 부산 서면 소리온 이비인후과의 젊고 친절한 의사가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내 병을 설명해 주었다. 몸에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중요한 부위를 먼저 살리려고 가끔 여기저기 차단이 일어나는데 나의 경우 귀로 가는 부분에 차단이 일어났다고.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나의 병이 왜 그렇게 시급한 일이었어야 했는지. 심장마비 환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듯이, 혹은 물에 빠져 기절한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듯이, 신속하고 적합한 대응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병. 정말 죽은 건지, 기절만 한 건 지 알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인공호흡을 해야 하는 거였다. 내 귀는 죽어 기절해 널브러져 있는데, 급한 응급 치료는커녕, 그 죽어가는 귀를 앞에 두고 이탈리아 프로토콜이 어쩌니 저쩌니 하던 의사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나의 경우 달팽이관 바깥의 청신경은 모두 기능을 하지 못 하고 있고, 가장 안쪽의 낮은 음역대를 들을 수 있는 달팽이관만 일부 살아있다고 했다. 그나마 한 달 넘게 토리노까지 새벽안개와 어둠을 헤치고 기어코 고압산소치료를 받은 덕분에 살려낸 결과였다.
이런 이야기, 해도 될까? 나는 의사들도 자신이 진료하는 과목의 병을 한 번쯤 앓아봤으면 좋겠다. “재수 없어서 바이러스 걸린 거고, 수술은 2400만 원.” 재.수.없.어.서??? 나는 그때 안 들리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한국에서 4년째 상급 병원 평가 1위라던 아산 병원 한 경험 많다는 의사가 내게 한 말이다. “지금 대충 들리잖아요. 그냥 이렇게 대충 듣고 살아요.” 귀찮은 듯 그 연륜 있는 젊잖게 생긴 의사가 아무렇지 않게 툭 하고 내뱉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이 의사가 뭐라고 떠드는 거지?’ 명의라고 신문에도 여러 번 난 사람이 환자를 앞에 놓고 한다는 말이……. 어쩜 어떻게 정말 이렇게 환자를 대충 대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물론, 양쪽 귀에 인공와우 수술을 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었으니, 나 따위 수술 날짜도 잡지 않는 환자는 귀찮기만 했겠지.
나는 의사결정(意思 決定)을 위해 의사(醫師)를 만난 거였다. 나를 아끼는 지인 중, 큰 병을 직접 앓았거나 가족 중 누군가 큰 병을 앓았던 분들의 진심 어린 조언을 따랐을 뿐이다. “어떤 결정이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적어도 세 명의 의사는 만나라. 정확한 진단을 받아라. 큰 병원도 가봐라.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잘하는 큰 병원으로.“
그 서울에서 잘한다는 의사에게 성의 없는 찰나의 진찰을 받고, 부산 백병원으로 향했다. “선생님, 제 귀는 완전히 죽은 걸까요, 아니면 코마 상태인 걸까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네요. 귀가 죽었다면 아예 들리지가 않겠지요?” 아주 일부분만 기능이 살아있는 청력이 언젠가 돌아오겠냐는 의도가 깔린 질문이었다. 그나마 그 의사는 청력이 상실되어 상한 마음을 아는 듯했다. “참……. 보통 외국에서 오신 분들은 치료를 거의 못 받고 오시는 게 보통이거든요? 그런데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다 충분히 받고 오셨네요? 이런 경우가 잘 없습니다.”
서울 아산 병원의 의사는 보청기를 껴봤자 어음 분별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 소용이 없을 거라고 했다. 수술만이 답이라고. 부산의 크고 작은 다른 두 병원의 의사들은 보청기를 권했다. 보청기를 끼고 말을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지속적인 청각적 자극을 뇌에 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세 곳의 병원과 한 곳의 보청기 전문 센터에서 총 네 번의 보청기 테스트를 했다. 나의 경우는 한쪽 난청이고, 그나마 낮은 음역대는 들려서 가장 좋은 보청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보청기 가격은 삼백에서 칠백 까지. 보통 2년이 지나면 잔고장이 나기 시작하니 2년에 한 번은 보청기를 새로 맞춰야 한다. 보청기 적응에는 두세 달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해라! 보청기고 수술이고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다면 무조건 해라!” “그러게요, 엄마.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보청기는 기대한 효과가 전혀 없네요. 두통만 너무 심해져요. 수술은……솔직히 도저히 못 하겠어요. 뼈를 깎아내고, 달팽이관에 선을 삽입하고, 수신기를 평생 밖에 보이게 부착하고 살아야 한다는데, 더구나 그 수술 시작된 지 50년밖에 안 됐대요. 기술은 더 좋아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며 내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 아버님이 나와 같은 경우로 인공 와우 수술을 받으셨지만 적응을 못 하셨다고 했다. 결국 다시 인공 와우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고. 그 후 뇌경색이 오셨는데, 인공 와우를 제거하지 않고 있었더라면 MRA, MRI 검사를 못 받았을 거라는 거였다.
순간 아찔했다. 뇌에 문제가 생겨도 급히 검사를 받을 수 없다니! 더구나 내 외할머니는 뇌경색으로 일찍 세상을 뜨셨다. “넌 어릴 때부터 신경성인지 두통이 너무 심하니 뇌 검사는 필히 받아야 한다! “ 엄마의 권유였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에만 집중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가? “하필 귀가 중요한 일을 하려는데 이렇게 덜컥 귀에 문제가 생기니?”친구에게 던진 우문에 친구는 현답을 건넸다. “나 아는 교수님도 귀 한쪽이 안 들려. 그런데 강의를 얼마나 잘하시는지 아니? 미리 양해는 구하는 거지. 제 한쪽 귀가 잘 안 들립니다하고.”
적극적인 방법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기, 아무것도 안 하기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매듭은 이렇게 짓는다. 듣기를 포기하고 있던 오른쪽 귀로 집중하고 듣는 훈련을 더 해 보기로. 한국에 가면 뭔가 물리적인 도움으로라도 의사소통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양쪽 귀가 다 멀쩡한 사람 중에도 상대방의 마음을 보지 못 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무례하게 이야기하는 의사소통 불구자들을 보면서, 귀는 불편할지언정 마음이 아픈 사람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는 참 쉽다.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다른 페이지를 열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오른쪽 뒤에서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풀벌레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른 가을 밀밭에 바람이 부는 소리 같기도 하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딛고 일어서라는 응원 소리일 거다.